[Cover Story] 1%의 가능성에 도전한 1세대 기업가들
기업가는 99%의 위험이 있더라도 1%의 가능성에 도전해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다. 주어진 조건과 환경에 얹혀 남들과 비슷한 물건을 파는 사람은 평범한 장사꾼일 뿐이다. 누가 뭐래도 기업가들은 세계 최빈국이던 대한민국을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키워낸 일등공신이다. 우리나라엔 외국에서도 높이 평가하는 존경할 만한 기업가들이 많다. 위대한 기업가들이 남긴 어록을 통해 잊혀져 가는 기업가 정신을 되새겨 보자.

#"어이, 해봤어?"

대한민국 기업가를 논할 때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을 빼놓을 수 없다. 그가 남긴 어록 “어이, 해봤어?”는 그의 철학을 대변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1984년 충남 서산간척지 공사였다. 당시 현대건설은 거센 물살 탓에 최종 물막이 공사에 어려움을 겪었다. 돌과 흙을 아무리 퍼부어도 물살에 휩쓸려 가버렸다. 실무자들은 “물을 막을 수가 없다”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때 고인은 고철로 분해하기 위해 정박해 있던 스웨덴 고철선에 주목했다. “저걸 단번에 가라앉혀 물길을 막자”는 생각에서였다. 그 유명한 ‘정주영 공법’이다. 현대건설은 이 공법으로 공사기간을 45개월에서 9개월로 줄였다. 공사비도 당시로선 거금인 280억원이나 줄였다.

TV광고에도 가끔 나오는 고인의 현대조선소 건립 사례도 마찬가지다. “먹을 것조차 제대로 생산해내지 못하는 국가에서 언감생심 조선소 건립이라니.” 당시 모든 사람은 그렇게 생각했다. 해외에서 누가 뭘 믿고 돈을 빌려주겠느냐는 게 당시의 ‘주어진 조건’이었다.

하지만 고인은 공사조차 시작되지 않은 조선소 부지 지도와 남에게서 빌린 유조선 도면 한 장만 들고 그리스인 리바노스 선주에게 “우리가 당신 배를 만들어 줄테니 사라”고 했다. 리바노스 씨는 ‘미친 사람’의 소리를 알아차린 유일한 ‘미친 사람’이었다. 계약은 기적적으로 성사됐고 영국의 수출보증국은 이것을 근거로 고인에게 ‘은행들이 현대에 돈을 빌려줘도 좋다’는 보증을 서주었다.

[Cover Story] 1%의 가능성에 도전한 1세대 기업가들

#일본이 하면 우리도 한다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는 오늘의 삼성전자를 있게 한 기업가다. 먹고 입는 것조차 제대로 없었던 1950년대 고인은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설립했다. 이건희 삼성 회장의 부친인 고인은 1969년 오늘의 삼성전자를 있게 한 중대결정을 내렸다. 바로 삼성전자를 세우기로 한 것. 고인은 당시 중소전자 업체들의 반대를 정면 돌파했다. 이들 업체는 “삼성이 콘덴서 등 중소전자산업에 진출하면 안된다”며 신문에 진정서 광고를 내기도 했다. 고인은 제일제당과 제일모직만으로는 미래가 없다는 판단을 했고, 미래를 위해선 전자산업에 승부수를 띄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1983년 반도체 산업진출은 최대 갈림길이었다. 삼성 내부에서조차 “일본 반도체의 벽을 절대로 넘을 수 없다”, “반도체 하면 삼성은 망한다”는 반대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일본에서도 “한국은 절대로 일본 기술을 뛰어넘는 반도체를 생산할 수 없다”는 비아냥이 쏟아졌다. 반도체 공장건설을 고인이 밀어붙였지만 공사 현장을 담당하는 주요 인사들은 공사를 하는 척만 하기도 했다. 잘못된 결정을 한 만큼 따를 수 없다는 몸짓이었다. 하지만 “일본이 반도체를 만들면 우리도 만들 수 있다”는 고인의 승부수로 인해 삼성전자는 지금 연매출 380조원, 고용인원 42만명, 수출 1567억달러를 기록하는 초일류 기업이 돼 있다.

#"저 바다에 빠져 죽자"

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도 큰 족적을 남겼다. 고인은 1968년 포스코의 전신인 포항제철을 세웠다. 국가발전을 위해 철강산업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정부의 산업정책과 고인의 특유한 철강보국 정신이 빚은 합작품이었다.

고인은 불철주야 제철소 공사에 심혈을 기울였다. 철강산업의 기초조차 갖춰져 있지 않은 나라에서 제철소를 짓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부지 선정에도 애를 먹었다. 지반이 암반으로 이뤄져 공사에 애를 먹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미국 차관단과 독일 철광업체 기술진이 “더 이상 못하겠다”며 철수하기까지 했다. 고인이 이때 한 말이 바로 “뒤로 돌아서 저 바다에 빠져 죽자”였다.

고인은 조업 개시 6개월 만에 흑자를 냈다. ‘철강왕’ 카네기가 연산 1000만t을 달성하는 데 35년이 걸렸지만 그는 25년 만에 연산 2100만t을 이뤄냈다.

1980년대 초 신일본제철을 방문한 중국 지도자 덩샤오핑은 “포항제철 같은 철강회사를 갖고 싶은데 도와 달라”고 요청했다가 망신을 당한 사건이 있었다. 이나야마 신일본제철 회장은 “불가능하다.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지 않으냐”며 고인을 높이 평가했다.

지금은 일반화됐지만 글로벌 경영을 일찌감치 실현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도 한 획을 그은 기업가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그룹이 해체되는 비운을 맞았지만 그는 세계경영을 모토로 중앙아시아, 동구권 등의 시장을 선점해 ‘킴기즈칸’(김우중+칭기즈칸)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유명한 어록을 남긴 그는 해외에서 재기를 꿈꾸고 있다.

고기완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dadad@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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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가는 얼마나 벌었느냐로 기억되지 않는다"

해외에도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기업가가 많다. 대표적인 인물이 애플의 스티브 잡스다. 잡스는 혁신을 통해 세계 정보기술 산업의 판도뿐 아니라 세계인의 삶 자체를 바꿔놨다. 잡스를 평가할 때 아무도 “얼마나 벌었는가”를 기준으로 삼지 않는 이유다.

[Cover Story] 1%의 가능성에 도전한 1세대 기업가들
영국 버진그룹 창업자이자 회장인 리처드 브랜슨은 “평생 얼마나 벌었느냐로 기억되는 사람은 없다. 중요한 것은 뭔가 특별한 것을 창조했는지, 다른 사람의 인생에 변화를 일으켰는지다”라고 강조한 바 있다. 잡스와 애플을 공동 창업한 프로그램 엔지니어 스티브 워즈니악은 “애플에도 경영위기가 있었지만 소비자가 상상하는 이상의 새로운 것을 만들겠다는 잡스의 혁신정신이 시장을 선도할 수 있게 해줬다”고 회상했다.

존 데이비슨 록펠러는 종종 악마로 평가되는 기업가다. 그는 아메리카 스탠다드 오일을 통해 미국 석유시장을 독점화해 막대한 부를 쌓았다는 비난과 함께 당시 석유가격을 독점 상황에서도 크게 떨어뜨려 석유 관련 산업을 번창하게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록펠러가 시장을 주무르지 않았으면 각 가정이 저렴한 가격에 석유를 살 수 없었고 화학섬유 회사의 비용도 크게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란 분석도 있다.

구글을 창업한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 NHN을 창업한 이해진 회장도 신세대 기업가에 속한다. 구글 창업자는 인터넷을 통한 검색이라는 지평을 열어 기존 미디어 시장의 판도를 바꿔놨다. 이해진 회장도 한국에서 검색과 게임산업을 일으켜 새로운 가치를 창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