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obal Issue] 아랍권 反美 시위 확산…문명 충돌로 가나
9·11 테러 11주년인 지난 11일 리비아 벵가지의 미국 영사관이 무장한 시위대에 기습 공격을 당했다. 이로 인해 크리스토퍼 스티븐스 리비아 주재 미국 대사와 영사관 직원 3명 등 모두 4명이 사망했다. 공격의 발단은 최근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에 올라온 14분짜리 영상물이었다. 로스앤젤레스(LA) 부근에 사는 콥트교(이집트서 생긴 기독교 분파) 신자인 ‘나쿨라 배슬리 나쿨라’가 제작한 것으로 알려진 이 영상물은 유튜브를 통해 아랍권으로 퍼졌다.

시위대의 분노는 서구문명 일반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 14일 수단에서는 시위대 수천명이 영국과 독일 대사관에 난입해 건물을 파괴하고 불을 질렀다.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방문한 레바논에서는 시위 과정에서 시위대 한 명이 사망했다. 지난해 아랍권의 민주화 혁명을 목격했던 미국 및 유럽 국가들은 당황하는 모습이다. 혁명으로 물러난 세속주의 정권의 자리를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이 채우면서 속속 반미로 돌아서고 있어서다.

#무슬림 비하 영상물이 발단

이번 사태를 촉발한 영상물의 제목은 ‘무슬림의 무지함(Innocence of Muslims)’이다. 지난 7월 초 처음 공개됐을 때는 별다른 문제를 초래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아랍어 더빙 버전이 유튜브에 다시 실리면서 파문이 확산됐다. 아랍권의 분노를 야기한 부분은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에 대한 묘사다. 영상물에서 무함마드는 여러 여성과 동시에 성관계를 갖는 것은 물론 소아성애를 승인한 변태성욕자이고 무책임한 가장이자 피묻은 칼을 든 도살자로 묘사된다.

서구의 문화 창작물에 대해 아랍권이 격분한 것은 1989년 영국의 소설가 살만 루슈디의 소설 ‘악마의 시’가 발표된 이후 이번이 처음이다. 당시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는 루슈디를 살해하라며 사형을 선고하기도 했다. 이번 시위는 리비아 이집트 아프가니스탄 튀니지 예멘 등 아랍권에서 광범위하게 벌어졌지만 특히 극심했던 곳은 리비아였다. 리비아에서 사태가 커진 것은 리비아 정부의 통제력이 약하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리비아에서는 수십년간 독재를 해온 무아마르 카다피의 세속주의 정권이 지난해 혁명으로 몰락하고 이슬람 원리주의 정치세력이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부족 간 갈등으로 아직 권력의 구심점이 이슬람 원리주의 쪽으로 넘어오지 못한 상태다. 이는 치안 공백으로 이어졌고 사건이 커지는 원인이 됐다는 것이다.

#아랍 휩쓰는 이슬람 원리주의

최근 아랍권에서 반미주의가 확산된 것은 다소 예견된 측면이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아랍 국가 정부들이 혁명을 통해 세속주의에서 이슬람 원리주의로 급격하게 정세변화를 겪고 있는 데다 현지 미군이 자존심 강한 아랍인들을 잇따라 자극하고 있어서다. 올해 초 시위로 40명의 사망자를 낸 아프가니스탄 코란 소각 사태가 대표적이다.

수십년간 세속주의 정부의 억압을 받던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들은 작년 각국의 혁명을 주도하면서 세를 확대하고 있다. 지난해 북아프리카 튀니지에서 일어난 ‘재스민혁명’ 이전만 해도 이슬람 원리주의가 득세한 곳은 혁명을 통해 신정(神政)이 들어선 이란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수십년간 미국과 서방을 등에 업고 권력을 장악했던 아랍권 세속주의 정부들이 잇따라 무너지자 대안으로 원리주의가 힘을 얻게 됐다.

튀니지의 경우 작년 하반기 치러진 총선에서 온건 이슬람주의당이 다수당으로 올라섰다. 예멘은 극단 원리주의가 득세하고 있다. 이 때문에 예멘은 테러조직 알카에다의 본거지가 된 상황이다. 이집트에서는 이슬람주의 정당이 내세운 후보가 대통령이 됐고 총선에서도 원리주의 정당들이 나란히 1, 2위를 차지했다. 아랍에서 원리주의가 다시 주목받는 이유는 그간 경제적으로 무능했던 세속주의 정권에 대한 반발 때문으로 해석된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군사쿠데타 등으로 정권을 잡은 세속주의 정권은 경제개발을 내세우고 친서방적인 외교·경제 정책을 폈지만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슬람 원리주의 정부가 곧 한계를 보일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세속주의 정부 때보다 경제적 문제 해결 능력이 떨어진다는 이유에서다.

#반미 정서 어디까지 갈까

아랍권에서의 반미 정서는 앞으로 더욱 강해질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최근 미국이 잇따라 중동정책의 허점을 노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이집트를 방문한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이슬람주의 정권과 군부 사이에서 어정쩡한 태도를 보여 이집트 국민들의 반미 정서에 불을 붙였다.

미국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CSM)는 “이집트 등지의 이슬람주의 정권들이 과격 이슬람주의와 반미주의에 어떻게 대응할지 의구심이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미 워싱턴근동정책연구소(WINEP)의 패트릭 클로슨 연구국장도 “온건 이슬람주의 정부가 더 과격한 이슬람 세력들이 영향력을 확대하는 통로를 마련해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임기훈/남윤선 한국경제신문 기자 shagg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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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공동체 순수성 지키려는 종교적 이념

이슬람 원리주의는…

이슬람 원리주의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분야 전반에 걸쳐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를 통해 이슬람 공동체의 순수성을 지키고자 하는 종교적 이념을 뜻한다. 하지만 석유 등 자원을 노린 서구 열강들이 잇따라 아랍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서 최근에는 특히 외세를 배격하고 강한 이슬람을 만드는 것을 이상으로 삼고 있다.

아랍권에서 대표적인 이슬람 원리주의 국가로는 이란이 꼽힌다. 1979년 이슬람혁명이 일어나고 호메이니가 사실상의 지도자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되면서 이란은 서방의 골칫거리가 됐다. 이슬람 원리주의 정치세력은 상대적으로 온건한 이집트의 무슬림형제단과 과격파인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레바논의 헤즈볼라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 대표 격은 무슬림형제단이다. 올해 치러진 대선에서 이집트 사상 처음으로 이슬람 원리주의자 대통령을 탄생시켰다. 지지 세력이 500만~1000만명에 이른다. 세계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오래된 이슬람주의 단체다. 무슬림형제단원들이 탄압을 피해 시리아 레바논 사우디아라비아 요르단 등으로 망명하면서 조직이 중동 전역에 퍼져 있다. 무슬림형제단의 기본적인 목표는 정치적·사회적 활동을 통해 사회를 개혁하는 것이다. 종교인이 아니라 ‘무슬림 사회 개혁’이란 목표에 뜻을 같이하는 변호사 의사 사회운동가 등이 1928년 설립했다. 이들은 교육·의료 분야의 자선 활동을 통해 서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들은 이집트 정부가 자신들을 불법세력으로 간주하자 1948년 마흐무드 파흐미 노크라시 총리를 암살했다. 이후 수십년간 탄압을 받다 작년 이집트 혁명을 주도하면서 핵심 정치세력으로 급부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