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수교 20년…공동번영 길을 닦다

미국의 대표적인 외교 정책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2008년 말 미국과 중국을 가리켜 ‘G2’라는 용어를 주창했다. 이제 중국을 주요 파트너로 삼아 서로 협력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미국과 중국은 2009년부터 외교 및 경제 현안을 의제로 삼는 ‘전략경제대화’를 매년 열고 있다. 이렇게 중국의 위상이 올라간 이유는 빠른 경제 성장 때문이다. 지난해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은 7조3000억달러(세계 2위)로 세계 1위 미국(15조900억달러)의 절반 수준이다. 현재처럼 연 8% 이상의 고성장을 계속하면 2020년 전후 중국이 미국을 따라잡게 된다. 하지만 중국이란 용이 승천하는 데는 만만치 않은 진통을 겪을 것이라는 의견도 많다. 빠른 성장 속도만큼 내부 모순도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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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발전 시동 건'개혁·개방'

중국의 정식 국호는 중화인민공화국이다. 1949년 10월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승리한 중국 공산당이 공산주의 국가 수립을 선포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가장 큰 과제는 경제 회복과 근대화였다. 군벌들의 난립,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 일본의 침략 등으로 중국은 수십년간 전란을 겪어야 했다. 1952년 중국은 1인당 국민소득이 50달러로 인도(60달러)보다 더 낮은 농업 위주의 후진국이었다.

하지만 근대화는 쉽지 않았다. 소련과의 분쟁으로 중국은 고립되었다. 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은 1958년 이전까지 어느 정도 용인되었던 경제적·사회적 ‘자유’를 없애버렸다. 그리고 자본과 인력을 집중해 단숨에 경제발전을 이룬다는 대약진 운동을 실시했지만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당시 철강 생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주민들은 가정에 있는 솥을 부숴 쇠붙이 조각을 바치고, 급조된 철강 공장은 산업적으로 쓸 수 없는 철덩어리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1950년대 말 가뭄으로 약 3000만명이 굶주림으로 죽어야 했다. 마오는 책임을 지고 물러났지만 1966년 극좌적인 문화대혁명을 조종해 권좌에 복귀했다. 그가 사망하는 1976년까지 중국 사회는 혼란 그 자체였다. 마오의 뒤를 이어 집권한 덩샤오핑이 1978년 개혁을 선언한 것은 이 악순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판단에서였다. 덩은 ‘국민이 잘살 수 있으면 그게 좋은 것’이라는 현실적인 노선을 택했다.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라는 흑묘백묘(黑猫白猫)론은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앞으로 최소한 100년 동안 경제만을 생각하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이후 34년간 중국 공산당은 점진적으로 시장 경제를 받아들인다는 노선을 취하면서 경제발전을 이끌고 있다.

# 독자적 산업고도화로 도약

개혁을 시작했지만 중국이 가진 것은 사람, 즉 노동력밖에 없었다. 중국이 적극적으로 대외 개방을 실시한 것은 풍부한 저임금 노동력을 내세워 외국에서 대규모 자본을 끌어오겠다는 의도였다. 1980년대 초부터 홍콩·대만의 화교 기업들이 중국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는 일본과 한국이 여기에 가세했고, 199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서방 기업들도 중국에 대거 공장을 건설했다. 이들은 값싼 노동력으로 제품을 생산해 해외로 수출했다. 애플 아이폰을 생산하는 폭스콘의 경우 대만계 기업이다. 폭스콘은 애플뿐만 아니라 휴렛팩커드(HP) 델 등 미국 IT기업들을 주고객으로 삼고 있다. 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등장하게 된 일등 공신이 바로 이들 외국기업이었다.

중국은 현재 산업 구조를 고도화해 질적 도약을 이룬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또 내수 시장을 육성해 높은 수출의존도를 줄인다는 복안이다. 중국은 외국 기업에 내수 시장을 개방하는 조건으로 자국 기업과의 합작 및 기술 이전을 요구해왔다. 선진국 기업이 중국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경쟁하는 과정에서 많은 기술을 이전해주고 있다. 중국 기업들 또한 자체적인 연구개발 투자를 늘리면서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빈부격차·민주화 등 과제 산적

하지만 ‘공짜 점심’은 없는 법이다. 중국의 화려한 발전은 여러 가지 문제를 낳고 있다. 그리고 이런 문제들이 앞으로 경제 발전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예측도 많다. 빠르게 경제가 발전하면서 상하이나 광저우 등의 부자와 내륙 농촌의 가난한 농민들의 격차는 점점 커지고 있다. 중국이 우주정거장 가동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발표했을 때 광둥성 중산시에서는 농촌 출신 일용직 노동자 수만명이 차별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중국에선 이런 집단소요가 연 10만건씩 일어난다. 경제성장률이 하락하면 사회갈등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밖에 없다.

서구에서는 이런 사회 갈등은 민주주의 정치를 통해 해소된다. 하지만 중국은 공산당에 의해 실질적인 일당 지배 체제가 유지되고 있다. 이에 따른 부패 문제도 심각하다. 공산주의가 이데올로기로서 힘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국가적 구심점도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 공산당이 2001년부터 빈부 격차 완화를 내세우는 이유다. 아직도 비대한 국영 기업의 정리와 심각한 환경 오염도 만만치 않은 문제다.

조귀동 한국경제신문 기자 claymore@hankyung.com

< 논술 포인트 >

중국의 빠른 경제 성장이 가능했던 원인을 논의해보자. 경제 성장과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해 의견을 나눠보자. 중국 경제가 새로운 체제인지, 아니면 국가주도형 자본주의의 변종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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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컨센서스 vs 워싱턴 컨센서스

[Cover Story] 中경제 굴곡의 60년사…대국굴기(大國堀起)로 G2시대 열다
베이징 컨센서스(Beijing Consensus)와 워싱턴 컨센서스(Wasington Consensus)는 각각 중국과 미국이 제시하는 경제 모델을 의미한다. 원래는 미국이 중남미 등 다른 나라에 제시하는 경제 모델이란 뜻으로 워싱턴 컨센서스라는 용어가 만들어졌다. 이후 중국 경제가 성장하고, 중국의 다른 나라들에 대한 영향력이 커지면서 베이징 컨센서스라는 용어가 주창됐다.

워싱턴 컨센서스는 한마디로 미국식 시장경제 체제다. 미국 수도 워싱턴DC에 모여 있는 미 행정부와 국제통화기구(IMF), 세계은행 등의 정책결정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합의다. 미국 경제학자 존 윌리엄슨이 1989년 자신의 저서에서 처음 사용했다. 윌리엄슨은 IMF와 세계은행이 중남미 등 구제금융이 필요한 나라들에 자금을 제공하면서 시장경제, 민영화, 자유무역 등을 요구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베이징 컨센서스는 타임지 기자인 조슈아 쿠퍼 라모가 2004년 워싱턴 컨센서스에 대립하는 개념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명확한 개념이 정립돼 있지는 않다. 하지만 자유시장과 계획경제의 혼용, 국가자본주의, 큰 정부, 규제 등 국가주도의 중국식 경제발전 모델을 가리킨다는 합의는 이루어져 있다. 베이징 컨센서스가 각광받는 이유는 개발도상국에 중국이 경제 성장의 모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미국식 시장경제에 대한 회의론이 커진 데다 중국이 본격적으로 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세를 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