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위 넘은 학교폭력…해법은 없을까?
1961년 미국 예일대 심리학과 교수 스탠리 밀그램은 인간의 폭력성에 대한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 밀그램은 ‘징벌에 의한 학습효과’를 측정하겠다며 사람들을 모았다. 그는 자원자들을 ‘선생’ 역할을 하는 집단과 ‘학생’ 역할을 하는 집단으로 각각 나누었다. 선생 1명과 학생 1명을 짝지은 뒤 학생 역할을 맡은 사람을 의자에 묶고 손목에 전기충격장치를 연결했다. 그리고 선생 역할을 맡은 이에게 “학생이 테스트에서 틀리면 전기충격을 가하는데 한 번 틀릴 때마다 15볼트씩 전압을 높이라”고 지시했다. 최고 전압은 450볼트로 설정됐다. 학생 역할을 맡은 사람은 실험팀의 일원으로 높은 전압의 전기충격을 받으면 무척 괴로워하는 연기를 하도록 짜여져 있었다.
실험 결과는 놀라웠다. 밀그램은 실험 전만 해도 최고 전압인 450볼트까지 전압을 높이는 참가자가 0.1% 이하일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450볼트까지 전압을 높인 사람은 전체 참가자의 65%에 달했다. 옆에 앉은 실험 관리자가 “걱정 말고 계속 전압을 높여라”고 지시하긴 했지만, 많은 이들이 처음 보게 된 다른 사람에게 거리낌없이 전기 ‘고문’을 가한 것이다. 이들 가운데 중간에 그만두겠다고 하거나, 실험 관리자에게 항의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 폭력적 인간, 호모 비오랑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철학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는 ‘폭력’이다. 여기서 폭력은 단순히 다른 사람에게 물리적인 위해를 가하고 사회를 파괴하는 행위에 국한되지 않는다. 인간의 본성과 사회에 깊숙이 뿌리박혀 있는 근본적인 특성이다. 프랑스 철학자 로제 다둔은 아예 폭력적 인간이란 뜻의 ‘호모 비오랑스(Homo Violence)’라는 표현까지 제기했다.
폭력에 대한 성찰이 중요한 주제가 된 이유는 문명이 빠르게 발전해왔지만 폭력 행위는 줄기는커녕 오히려 더 잔혹해지고 대규모화되는 양상을 보였기 때문이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이전까지의 전쟁과 달리 군인뿐만 아니라 민간인들도 전쟁에 참여하는 총력전이었다.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특정한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죽이는 홀로코스트(인종청소)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특별히 반사회적인 성품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 충격적이었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보통 사람들도 얼마든지 잔혹해질 수 있다며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을 남겼다.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인간의 무의식에 파괴적인 본성이 숨겨져 있다고 설명했다. 그가 고안한 ‘타나토스’라는 개념은 일종의 ‘죽음의 본능’이다. 인간의 내면 한편에는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공격하고 파괴해 무(無)로 되돌리고자 하는 속성이 있다는 얘기다. 사람들이 갖고 있는 본능적 에너지인 ‘이드’는 즉자적인 욕망만을 좇으며 자연스레 공격적이다. 이를 제어하는 것은 인간의 ‘자아’와 내면화된 규범인 ‘초자아’다. 심리학자 존 달라드는 폭력은 욕망을 채우지 못한 좌절에서 나온다고 주장했다. 동물행동학자 콘래드 로렌츠는 폭력성은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 살아남은 동물로서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보았다.
#사회적 학습에 좌우되는 폭력
하지만 여기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밀그램 실험으로 되돌아가보자. ‘선생’과 ‘학생’을 한 방에 집어넣고 실험을 실시했을 경우 최고로 전압을 높인 사람의 비율은 40%였다. 손목에 직접 전기충격기를 대도록 하면 30%까지 떨어진다. 좀 더 덜 학술적인 분위기에서는 48%, 실험관리자가 없을 경우에는 21%로 하락했다. 실험 관리자를 두 명으로 늘리고 이들이 전압을 더 올려도 되는지 논쟁할 경우 불과 10%였다. 이 실험에서 사람들이 잔혹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피험자를 실험 대상으로 간주할 수 있었던 환경과 △폭력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해줄 수 있는 권위적인 전문가의 존재 때문이었던 것이다. 요컨대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사회에서 학습을 통해 획득한 속성이 문제였다는 얘기다.
나치의 인종 청소를 연구한 학자들은 나치가 인종 청소를 ‘살인’이 아니라 일상적인 ‘작업’으로 만들기 위해 다양한 심리적 장치를 고안했다고 분석했다. 핵심은 폭력의 대상을 ‘사물’처럼 바라보도록 하는 것이었다. 후투족과 투치족이 서로 수백만명을 죽인 르완다 내전은 벨기에 식민정부의 수십년에 걸친 인종 차별 정책이 핵심 원인이었다. 군대에서의 구타나 가혹 행위들은 이전의 불평등한 권력관계가 병리적으로 표출된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폭력 이전에 불평등한 권력이 있는 셈이다.
#폭력에 대응하는문화도 진화
남성 두 명이 최소한의 규칙만 가지고 싸움을 벌이는 이종격투기는 오늘날 인기 있는 스포츠 가운데 하나다. 그만큼 폭력에 관한 욕망이 인간의 내면에 존재한다는 증거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동물적 속성에서 윤리적 당위성이 부여될 이유는 없다. 진화생물학자 폴 에얼릭은 인간의 행동에는 문화와 윤리도 본성만큼이나 중요하며,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윤리를 발달시키는 능력은 생물학적 진화의 산물이지만, 진화는 우리에게 무엇을 해야 한다고 명령하지는 않는다”는 그의 주장은 음미할 가치가 있다.
조귀동 한국경제신문 기자 claymore@hankyung.com
< 논술 포인트 >
인간은 원래 폭력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환경에 의해 폭력적이 되는 것인지 토론해 보자. 폭력성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그것을 억제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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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한 폭력은 가능한가?
정당한 폭력은 과연 가능한가. 일반적으로 폭력은 부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이 사사로운 이유에서 다른 사람이나 집단을 직접적으로 공격하고 위협하는 행동은 현존하는 법 질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물리적 폭력은 오로지 국가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물리적 폭력을 독점하는 지배권력은 시민들의 ‘공유물’로 여겨진다. 이처럼 국가가 ‘정당한 물리적 폭력 행사의 독점’에 성공한 것은 근대 민주주의의 산물이다. 국가는 끊임없이 선거라는 형태로 시민들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는다. 또 물리력은 오로지 법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근대 이전 국가에서는 왕과 귀족 등 특정한 집단이 폭력을 독점하고, 이를 다른 이에게 강요했다. ‘짐은 곧 국가’라는 17세기 프랑스 왕 루이 14세의 말은 이를 잘 드러낸다.
문제는 국가가 독점한 폭력의 정당성이 인정받지 못할 때 발생한다. 식민지 권력에 대한 피식민지 민중의 저항은 어디까지 인정받을 수 있을까. 그리고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탈취한 독재 권력에 대한 저항은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가. 두 가지 경우 모두 저항 세력은 테러 활동을 즐겨 사용하곤 한다. 그리고 그들이 저지르는 폭력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기 마련이다. 폭력이라는 수단이 저항이라는 목적 자체를 훼손하는 경우도 많다.
국가 외부의 적에 대한 폭력, 즉 전쟁 행위도 비슷한 딜레마를 갖고 있다. 외적이라는 이유로 무제한의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 그리고 정당한 전쟁이란 가능한지에 관한 논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정당한 폭력’이 오가는 와중에 발생한 민간인 희생자들에 대해 동정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과연 충분한 것일까.
1961년 미국 예일대 심리학과 교수 스탠리 밀그램은 인간의 폭력성에 대한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 밀그램은 ‘징벌에 의한 학습효과’를 측정하겠다며 사람들을 모았다. 그는 자원자들을 ‘선생’ 역할을 하는 집단과 ‘학생’ 역할을 하는 집단으로 각각 나누었다. 선생 1명과 학생 1명을 짝지은 뒤 학생 역할을 맡은 사람을 의자에 묶고 손목에 전기충격장치를 연결했다. 그리고 선생 역할을 맡은 이에게 “학생이 테스트에서 틀리면 전기충격을 가하는데 한 번 틀릴 때마다 15볼트씩 전압을 높이라”고 지시했다. 최고 전압은 450볼트로 설정됐다. 학생 역할을 맡은 사람은 실험팀의 일원으로 높은 전압의 전기충격을 받으면 무척 괴로워하는 연기를 하도록 짜여져 있었다.
실험 결과는 놀라웠다. 밀그램은 실험 전만 해도 최고 전압인 450볼트까지 전압을 높이는 참가자가 0.1% 이하일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450볼트까지 전압을 높인 사람은 전체 참가자의 65%에 달했다. 옆에 앉은 실험 관리자가 “걱정 말고 계속 전압을 높여라”고 지시하긴 했지만, 많은 이들이 처음 보게 된 다른 사람에게 거리낌없이 전기 ‘고문’을 가한 것이다. 이들 가운데 중간에 그만두겠다고 하거나, 실험 관리자에게 항의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 폭력적 인간, 호모 비오랑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철학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는 ‘폭력’이다. 여기서 폭력은 단순히 다른 사람에게 물리적인 위해를 가하고 사회를 파괴하는 행위에 국한되지 않는다. 인간의 본성과 사회에 깊숙이 뿌리박혀 있는 근본적인 특성이다. 프랑스 철학자 로제 다둔은 아예 폭력적 인간이란 뜻의 ‘호모 비오랑스(Homo Violence)’라는 표현까지 제기했다.
폭력에 대한 성찰이 중요한 주제가 된 이유는 문명이 빠르게 발전해왔지만 폭력 행위는 줄기는커녕 오히려 더 잔혹해지고 대규모화되는 양상을 보였기 때문이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이전까지의 전쟁과 달리 군인뿐만 아니라 민간인들도 전쟁에 참여하는 총력전이었다.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특정한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죽이는 홀로코스트(인종청소)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특별히 반사회적인 성품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 충격적이었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보통 사람들도 얼마든지 잔혹해질 수 있다며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을 남겼다.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인간의 무의식에 파괴적인 본성이 숨겨져 있다고 설명했다. 그가 고안한 ‘타나토스’라는 개념은 일종의 ‘죽음의 본능’이다. 인간의 내면 한편에는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공격하고 파괴해 무(無)로 되돌리고자 하는 속성이 있다는 얘기다. 사람들이 갖고 있는 본능적 에너지인 ‘이드’는 즉자적인 욕망만을 좇으며 자연스레 공격적이다. 이를 제어하는 것은 인간의 ‘자아’와 내면화된 규범인 ‘초자아’다. 심리학자 존 달라드는 폭력은 욕망을 채우지 못한 좌절에서 나온다고 주장했다. 동물행동학자 콘래드 로렌츠는 폭력성은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 살아남은 동물로서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보았다.
#사회적 학습에 좌우되는 폭력
하지만 여기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밀그램 실험으로 되돌아가보자. ‘선생’과 ‘학생’을 한 방에 집어넣고 실험을 실시했을 경우 최고로 전압을 높인 사람의 비율은 40%였다. 손목에 직접 전기충격기를 대도록 하면 30%까지 떨어진다. 좀 더 덜 학술적인 분위기에서는 48%, 실험관리자가 없을 경우에는 21%로 하락했다. 실험 관리자를 두 명으로 늘리고 이들이 전압을 더 올려도 되는지 논쟁할 경우 불과 10%였다. 이 실험에서 사람들이 잔혹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피험자를 실험 대상으로 간주할 수 있었던 환경과 △폭력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해줄 수 있는 권위적인 전문가의 존재 때문이었던 것이다. 요컨대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사회에서 학습을 통해 획득한 속성이 문제였다는 얘기다.
나치의 인종 청소를 연구한 학자들은 나치가 인종 청소를 ‘살인’이 아니라 일상적인 ‘작업’으로 만들기 위해 다양한 심리적 장치를 고안했다고 분석했다. 핵심은 폭력의 대상을 ‘사물’처럼 바라보도록 하는 것이었다. 후투족과 투치족이 서로 수백만명을 죽인 르완다 내전은 벨기에 식민정부의 수십년에 걸친 인종 차별 정책이 핵심 원인이었다. 군대에서의 구타나 가혹 행위들은 이전의 불평등한 권력관계가 병리적으로 표출된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폭력 이전에 불평등한 권력이 있는 셈이다.
#폭력에 대응하는문화도 진화
남성 두 명이 최소한의 규칙만 가지고 싸움을 벌이는 이종격투기는 오늘날 인기 있는 스포츠 가운데 하나다. 그만큼 폭력에 관한 욕망이 인간의 내면에 존재한다는 증거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동물적 속성에서 윤리적 당위성이 부여될 이유는 없다. 진화생물학자 폴 에얼릭은 인간의 행동에는 문화와 윤리도 본성만큼이나 중요하며,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윤리를 발달시키는 능력은 생물학적 진화의 산물이지만, 진화는 우리에게 무엇을 해야 한다고 명령하지는 않는다”는 그의 주장은 음미할 가치가 있다.
조귀동 한국경제신문 기자 claymore@hankyung.com
< 논술 포인트 >
인간은 원래 폭력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환경에 의해 폭력적이 되는 것인지 토론해 보자. 폭력성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그것을 억제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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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한 폭력은 가능한가?
정당한 폭력은 과연 가능한가. 일반적으로 폭력은 부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이 사사로운 이유에서 다른 사람이나 집단을 직접적으로 공격하고 위협하는 행동은 현존하는 법 질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물리적 폭력은 오로지 국가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물리적 폭력을 독점하는 지배권력은 시민들의 ‘공유물’로 여겨진다. 이처럼 국가가 ‘정당한 물리적 폭력 행사의 독점’에 성공한 것은 근대 민주주의의 산물이다. 국가는 끊임없이 선거라는 형태로 시민들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는다. 또 물리력은 오로지 법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근대 이전 국가에서는 왕과 귀족 등 특정한 집단이 폭력을 독점하고, 이를 다른 이에게 강요했다. ‘짐은 곧 국가’라는 17세기 프랑스 왕 루이 14세의 말은 이를 잘 드러낸다.
문제는 국가가 독점한 폭력의 정당성이 인정받지 못할 때 발생한다. 식민지 권력에 대한 피식민지 민중의 저항은 어디까지 인정받을 수 있을까. 그리고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탈취한 독재 권력에 대한 저항은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가. 두 가지 경우 모두 저항 세력은 테러 활동을 즐겨 사용하곤 한다. 그리고 그들이 저지르는 폭력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기 마련이다. 폭력이라는 수단이 저항이라는 목적 자체를 훼손하는 경우도 많다.
국가 외부의 적에 대한 폭력, 즉 전쟁 행위도 비슷한 딜레마를 갖고 있다. 외적이라는 이유로 무제한의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 그리고 정당한 전쟁이란 가능한지에 관한 논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정당한 폭력’이 오가는 와중에 발생한 민간인 희생자들에 대해 동정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과연 충분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