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래 쇼'는 멈춰야 할까
자연과 인간은 우주의 동행자다. 때론 나란히 걷고, 때론 갈등하고 대립한다. 하지만 자연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생활의 터전 자체가 된다는 것은 분명한 명제다. 자연을 보듬고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경제개발과 환경보호는 대표적 갈등구조다. 환경론자들은 경제성장을 억제해서라도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성장론자들은 경제성장에는 어느 정도의 환경파괴가 불가피하다고 반박한다. 행복을 측정하는 척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하지만 인류가 지속가능한 성장을 이루려면 자연과 공생하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 이 사실만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진리다.
# 성장은 환경을 파괴만 할까
성장과 환경은 일반적으로 대립구조로 이해된다. 도로를 건설하고, 아파트를 짓고, 공장을 세우는 것은 결국 자연의 일부를 인간이 잠식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자연은 인간에게 성장의 공간을 제공한다. 이는 세상의 이치다. 자연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터전을 제공하는 것은 그 존재 자체의 목적이기도 하다. 물론 그런 자연을 잘 보호하고 보전하는 것은 인간의 의무이다.
고속도로는 경제성장 인프라의 핵심이다. 박정희 대통령시절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때 반대가 들끓었다. “부자들의 유람도로다, 재원은 어떻게 마련하느냐” 등의 비난에서부터 “국가를 반동강이 낸다”는 환경단체들의 목소리도 높았다. 그러나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은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시발점이었다는 점은 대다수가 동의한다. 정부가 KTX 서울~부산간 주행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해 천성산에 터널을 뚫고자 했을 때 환경론자들은 “천성산에 터널이 뚫리면 도롱뇽이 살지 못하고 생태계는 파괴된다”며 격렬하게 반대했다. 우여곡절 끝에 7년 만에 터널이 뚫렸지만 “천성산에 도롱뇽이 사라졌다”는 목소리는 어디서도 들리지 않는다. 반면 국민들의 하루 생활권은 그만큼 넓어졌다.
경제성장으로 환경이 파괴된다는 주장은 일리가 있다. 경제성장이 때론 하천을, 때론 공기를 오염시킨다. 자연은 그런 인간에게 가끔 끔찍한 형벌을 내리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과 자연이 항상 대립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기존의 환경에 인공을 가해 더 가치있는 자연도 만들어 낸다. 녹지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공원은 인간과 자연이 함께 숨쉬는 공생의 공간이다. 인공을 가한 자연이 항상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아프리카의 밀림이 인간과 공생하는 최적의 자연이 아닌 것과 같은 이유다.
#동물원의 동물은 항상 불행?
동물원으로 얘기를 좁혀보자. 원래 동물원은 동물이 있어야 할 최적의 자리는 아니다. 새의 삶에는 숲이 제격이고, 호랑이는 아프리카 밀림이 제격이다. 돌고래는 바다가 고향이다. 극단적인 동물 애호론자들의 주장대로라면 동물원이 존재해서는 안된다. 동물원은 ‘동물학대’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동물원이 자유로운 삶의 공간을 제한하고 동물들을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킨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물원은 사람과 동물이 소통하는 또 하나의 공간이다. 동물원을 찾는 어린이들은 동물들의 귀여운 몸짓에서 즐거움을 느낌과 동시에 동물들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가질 수도 있다. 서울대공원에서 돌고래 쇼를 본 경험이 있는 어린이와 한번도 본적이 없는 어린이가 있다고 가정하자. 어느날 지구촌 어디에서 죽어가는 (다른) 돌고래들이 있다는 뉴스를 들었다고 하면 어느 어린이가 더 안타까워할까. 동물 애호론자들은 돌고래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한 훈련과정에서 엄청난 고통을 받았을 거라고 주장한다. 물론 ‘엄청난 고통’일지 그들의 습성에 약간의 훈련이 더해진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돌고래 쇼를 보며 동심을 키우는 어린이들이 많다면 그 또한 돌고래와 인간이 공생하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서울대공원의 돌고래 쇼를 몇몇 사람의 판단으로 중단시키는 것이 옳지만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자연의 동행이 답이다
21세기 핵심 키워드는 ‘지속가능한 성장’이다. 지속가능한 성장은 국가나 기업 모두에 적용된다. 국가 지도자들은 오늘보다 더 번영된 미래의 국가를 만들어야 하고, 기업 경영자들은 오늘보다 더 견실한 미래의 기업을 일궈야 한다. 지속가능한 성장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동행에 그 해답이 숨겨있다. 국가 지도자들은 환경을 보전하면서 경제성장을 지속하는 합리적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생태계 복원, 적절한 성장속도 조절, 무분별한 개발 자제 등이 필요하다. 기업들은 에너지효율적인 생산기술을 개발하고, 오염을 최소화하는 데 지혜를 모아야 한다. 물론 지속가능한 성장은 환경적 요소만이 전부는 아니다. 나눔, 봉사, 배려, 헌신 등 사회적 미덕을 키우는 것도 지속가능한 성장의 버팀목들이다.
자연과 인간의 지혜로운 공생은 슬로건만으론 되지 않는다.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뤄야만 지구촌의 삶이 풍요로워지고 행복해진다는 믿음을 갖고 이를 위한 실천의 발걸음을 더 힘차게 내디뎌야 한다.
신동열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shins@hankyung.com
<논술 포인트>
경제성장은 항상 환경을 파괴하는지를 생각해 보자. 또 이런 논리라면 경제선진국들의 환경이 개발도상국보다 상대적으로 잘 보전되고 있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논의해 보자. 인간과 자연이 행복하게 어우러져 사는 방법들을 토론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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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롱뇽만도 못한 탈북자 인권?
환경보호는 핵심 정치 이슈
환경은 언제나 정치권의 핵심 이슈다. 특히 선거철이 다가오면 환경은 더 정치색이 입혀져 정치권을 달군다. 제주도 해군기지 반대의 빌미를 제공한 구럼비 바위, 4대강 사업, 천성산 터널공사 때의 도롱뇽은 모두 다분히 정치색이 덧칠해진 이슈들이다. “(제주도 해군기지가 건설되는) 강정마을에 마을주민보다 외부에서 달려온 사람들이 더 많다”는 마을 이장의 한탄은 구럼비 보호라는 명분으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읽혀진다. ‘도롱뇽을 살리자’며 천성산터널 공사를 극렬히 반대했던 시민단체도 정부정책 반대를 생태계 보호라는 명분으로 포장한 측면이 없지 않다.
탈북자 출신으로 최근 중국의 탈북자 북송에 항의하며 단식시위를 벌였던 이애란 북한전통음식연구원장이 “탈북자의 인권이 도롱뇽만도 못하냐”고 한탄한 것이 이를 잘 설명한다. 그는 천성산 터널공사를 둘러싼 찬반 논란이 한창일 때 옳고 그르냐를 떠나 동물의 생명까지 존중하는 남한 사회에 큰 감명을 받았는데 알고 보니 참 비정하더라고 탄식했다. “구럼비가 운다”고 하소연하던 사람들도, “돌고래에 자유를 주자”고 목청을 높인 사람들도 대부분 인간의 목숨이 걸린 문제엔 입을 다물고 있다. 이는 모든 사회·정치적 이슈를 ‘표의 득실’로만 따지려는 전형적인 3류정치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환경보호에 정치의 색깔을 덧씌우는 것은 바로 환경을 정치적으로 오염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다. “북한 주민들이 도롱뇽보다 가치가 없느냐”는 질문을 정치권이나 일부 시민단체는 곰곰이 되씹어봐야 한다.
자연과 인간은 우주의 동행자다. 때론 나란히 걷고, 때론 갈등하고 대립한다. 하지만 자연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생활의 터전 자체가 된다는 것은 분명한 명제다. 자연을 보듬고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경제개발과 환경보호는 대표적 갈등구조다. 환경론자들은 경제성장을 억제해서라도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성장론자들은 경제성장에는 어느 정도의 환경파괴가 불가피하다고 반박한다. 행복을 측정하는 척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하지만 인류가 지속가능한 성장을 이루려면 자연과 공생하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 이 사실만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진리다.
# 성장은 환경을 파괴만 할까
성장과 환경은 일반적으로 대립구조로 이해된다. 도로를 건설하고, 아파트를 짓고, 공장을 세우는 것은 결국 자연의 일부를 인간이 잠식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자연은 인간에게 성장의 공간을 제공한다. 이는 세상의 이치다. 자연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터전을 제공하는 것은 그 존재 자체의 목적이기도 하다. 물론 그런 자연을 잘 보호하고 보전하는 것은 인간의 의무이다.
고속도로는 경제성장 인프라의 핵심이다. 박정희 대통령시절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때 반대가 들끓었다. “부자들의 유람도로다, 재원은 어떻게 마련하느냐” 등의 비난에서부터 “국가를 반동강이 낸다”는 환경단체들의 목소리도 높았다. 그러나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은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시발점이었다는 점은 대다수가 동의한다. 정부가 KTX 서울~부산간 주행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해 천성산에 터널을 뚫고자 했을 때 환경론자들은 “천성산에 터널이 뚫리면 도롱뇽이 살지 못하고 생태계는 파괴된다”며 격렬하게 반대했다. 우여곡절 끝에 7년 만에 터널이 뚫렸지만 “천성산에 도롱뇽이 사라졌다”는 목소리는 어디서도 들리지 않는다. 반면 국민들의 하루 생활권은 그만큼 넓어졌다.
경제성장으로 환경이 파괴된다는 주장은 일리가 있다. 경제성장이 때론 하천을, 때론 공기를 오염시킨다. 자연은 그런 인간에게 가끔 끔찍한 형벌을 내리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과 자연이 항상 대립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기존의 환경에 인공을 가해 더 가치있는 자연도 만들어 낸다. 녹지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공원은 인간과 자연이 함께 숨쉬는 공생의 공간이다. 인공을 가한 자연이 항상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아프리카의 밀림이 인간과 공생하는 최적의 자연이 아닌 것과 같은 이유다.
#동물원의 동물은 항상 불행?
동물원으로 얘기를 좁혀보자. 원래 동물원은 동물이 있어야 할 최적의 자리는 아니다. 새의 삶에는 숲이 제격이고, 호랑이는 아프리카 밀림이 제격이다. 돌고래는 바다가 고향이다. 극단적인 동물 애호론자들의 주장대로라면 동물원이 존재해서는 안된다. 동물원은 ‘동물학대’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동물원이 자유로운 삶의 공간을 제한하고 동물들을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킨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물원은 사람과 동물이 소통하는 또 하나의 공간이다. 동물원을 찾는 어린이들은 동물들의 귀여운 몸짓에서 즐거움을 느낌과 동시에 동물들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가질 수도 있다. 서울대공원에서 돌고래 쇼를 본 경험이 있는 어린이와 한번도 본적이 없는 어린이가 있다고 가정하자. 어느날 지구촌 어디에서 죽어가는 (다른) 돌고래들이 있다는 뉴스를 들었다고 하면 어느 어린이가 더 안타까워할까. 동물 애호론자들은 돌고래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한 훈련과정에서 엄청난 고통을 받았을 거라고 주장한다. 물론 ‘엄청난 고통’일지 그들의 습성에 약간의 훈련이 더해진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돌고래 쇼를 보며 동심을 키우는 어린이들이 많다면 그 또한 돌고래와 인간이 공생하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서울대공원의 돌고래 쇼를 몇몇 사람의 판단으로 중단시키는 것이 옳지만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자연의 동행이 답이다
21세기 핵심 키워드는 ‘지속가능한 성장’이다. 지속가능한 성장은 국가나 기업 모두에 적용된다. 국가 지도자들은 오늘보다 더 번영된 미래의 국가를 만들어야 하고, 기업 경영자들은 오늘보다 더 견실한 미래의 기업을 일궈야 한다. 지속가능한 성장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동행에 그 해답이 숨겨있다. 국가 지도자들은 환경을 보전하면서 경제성장을 지속하는 합리적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생태계 복원, 적절한 성장속도 조절, 무분별한 개발 자제 등이 필요하다. 기업들은 에너지효율적인 생산기술을 개발하고, 오염을 최소화하는 데 지혜를 모아야 한다. 물론 지속가능한 성장은 환경적 요소만이 전부는 아니다. 나눔, 봉사, 배려, 헌신 등 사회적 미덕을 키우는 것도 지속가능한 성장의 버팀목들이다.
자연과 인간의 지혜로운 공생은 슬로건만으론 되지 않는다.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뤄야만 지구촌의 삶이 풍요로워지고 행복해진다는 믿음을 갖고 이를 위한 실천의 발걸음을 더 힘차게 내디뎌야 한다.
신동열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shins@hankyung.com
<논술 포인트>
경제성장은 항상 환경을 파괴하는지를 생각해 보자. 또 이런 논리라면 경제선진국들의 환경이 개발도상국보다 상대적으로 잘 보전되고 있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논의해 보자. 인간과 자연이 행복하게 어우러져 사는 방법들을 토론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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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롱뇽만도 못한 탈북자 인권?
환경보호는 핵심 정치 이슈
환경은 언제나 정치권의 핵심 이슈다. 특히 선거철이 다가오면 환경은 더 정치색이 입혀져 정치권을 달군다. 제주도 해군기지 반대의 빌미를 제공한 구럼비 바위, 4대강 사업, 천성산 터널공사 때의 도롱뇽은 모두 다분히 정치색이 덧칠해진 이슈들이다. “(제주도 해군기지가 건설되는) 강정마을에 마을주민보다 외부에서 달려온 사람들이 더 많다”는 마을 이장의 한탄은 구럼비 보호라는 명분으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읽혀진다. ‘도롱뇽을 살리자’며 천성산터널 공사를 극렬히 반대했던 시민단체도 정부정책 반대를 생태계 보호라는 명분으로 포장한 측면이 없지 않다.
탈북자 출신으로 최근 중국의 탈북자 북송에 항의하며 단식시위를 벌였던 이애란 북한전통음식연구원장이 “탈북자의 인권이 도롱뇽만도 못하냐”고 한탄한 것이 이를 잘 설명한다. 그는 천성산 터널공사를 둘러싼 찬반 논란이 한창일 때 옳고 그르냐를 떠나 동물의 생명까지 존중하는 남한 사회에 큰 감명을 받았는데 알고 보니 참 비정하더라고 탄식했다. “구럼비가 운다”고 하소연하던 사람들도, “돌고래에 자유를 주자”고 목청을 높인 사람들도 대부분 인간의 목숨이 걸린 문제엔 입을 다물고 있다. 이는 모든 사회·정치적 이슈를 ‘표의 득실’로만 따지려는 전형적인 3류정치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환경보호에 정치의 색깔을 덧씌우는 것은 바로 환경을 정치적으로 오염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다. “북한 주민들이 도롱뇽보다 가치가 없느냐”는 질문을 정치권이나 일부 시민단체는 곰곰이 되씹어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