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으로는 조용하지만 민주화와 경제발전에 대한 열망은 어느 때보다 높습니다.”

아웅산 수치 여사가 이끄는 민주주의국민동맹(NLD)이 지난 1일 치러진 보궐선거에서 승리한 것이 사실상 확정된 후, 한 현지 한국 기업이 전한 분위기다. 그는 “민주화 세력이 선거에서 이기면서 서방과의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며 “이에 따라 외국 기업의 직접 투자도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다른 현지주재원도 “미얀마 국민들은 테인 세인 대통령과 수치 여사가 협력해 민주화를 추진하는 것에 기대가 크다”고 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수치 여사가 제도권 정치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며 “미얀마에 새 시대가 열렸다”고 보도했다.

#수치 여사의 NLD, 선거 압승

외신들은 수치가 이끄는 NLD가 보궐선거가 치러진 45개 선거구 중 43개 지역구에서 승리한 것으로 확정됐다고 4일 보도했다. NLD는 45개 선거구 중 44곳에 후보를 냈다. 상대당도 NLD의 승리를 인정했다. 수치는 선거 결과에 대해 “미얀마 민주주의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선언했다.

보궐선거에선 승리했지만 겉으로는 NLD는 아직까지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 힘들다. 미얀마의 상·하원 의석을 합하면 총 664석이다. 이 중 현재 집권당인 군부가 차지한 의석이 83%다. NLD가 후보를 낸 44곳에서 모두 이기더라도 전체 의석 수의 7%를 차지하는 것에 그친다.

하지만 수면 아래의 움직임은 다르다. 이번 선거가 민주화와 개방의 신호탄이 될 것이라는 전망 때문이다. 개혁·개방은 급속도로 빨라질 전망이다. 또 미얀마를 둘러싼 중국,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의 패권다툼도 심해질 것으로 보인다.

#전략적 요충지… 긴장하는 중국

미국과 중국은 미얀마에서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힘을 쏟고 있다. 미얀마가 전략적 요충지로 가치가 높기 때문이다. 중국 입장에선 미얀마는 지리석으로 인도양에 진출하는 관문이다. 세계적으로 점점 커지는 중국의 영향력을 저지하려는 미국에게도 미얀마는 양보할 수 없는 곳이다.

미얀마는 최근 서방과의 외교를 크게 늘렸다.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지난해 12월 미얀마를 방문했다. 미국 국무장관이 미얀마를 방문한 건 50년 만의 일이다. 중국은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적’이 아군 진영 한가운데 들어온 셈이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은 관영매체를 통해 “미국이 중국을 저지하기 위해 꼼수를 부리고 있다”고 비난했다.

중국은 대신 대 미얀마 투자를 크게 늘렸다. 미국을 이기기 위해서다. 중국은 최근 미얀마와 자국을 잇는 가스, 석유 파이프라인 건설과 관련된 원조계획을 발표했다. 또 미얀마에서 각종 사업을 진행할 때는 토지 사용료를 내기로 했다. 이제까진 사실상 무료로 썼다. 학교와 병원도 지어주기로 했다.

미국도 맞불을 놓고 있다. 미얀마를 묶어 놓았던 경제제재를 단계적으로 해제할 전망이다. 또 세계은행(WB), 아시아개발은행(ADB),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금융기구들의 미얀마 지원을 허용했다. 미국의 석유개발업체 유노칼은 프랑스 토탈과 함께 미얀마 해상 천연가스 개발에 참여 중이다.

#밀려드는 외국자본들

열강들이 미얀마에 군침을 흘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자원과 노동력 때문이다. 미얀마의 인건비는 태국의 6분의 1 수준이다. 원유, 천연가스, 목재, 광물 등의 자원도 풍부하다. 구리와 니켈 매장량은 각각 11억t과 4300만t으로 세계 1위다.

미국과 중국뿐 아니라 다른 국가들도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최근 유럽연합(EU)은 미얀마 대통령과 각료들에 대한 비자 발급 금지를 해제하는 등 제재를 완화했다. EU도 올해부터 2년간 걸쳐 1억5000만유로(2265억원)를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인도는 미얀마에 항만을 건설할 예정이다. 전력케이블 공장 건설과 송전선 설치에도 총 8400만달러를 지원할 계획이다.

미얀마 정부도 몰려드는 외국 투자를 유지하기 위해 각종 규제를 완화하고 있다. 선거를 계기로 고정환율제를 폐지하고 관리 변동환율제를 도입했다. 또 외국인 투자법을 개정해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5년간 소득세를 면제해주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미얀마의 빠른 산업화는 동남아시아 노동시장에도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태국이나 싱가포르 등으로 나갔던 약 100만명의 미얀마 근로자들이 자국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미얀마 노동자들은 태국 등지에서 현지인들의 약 30~50% 수준의 임금을 받는다. 주로 3D 업종에 종사하고 있다. 미얀마 노동자들이 귀국하면 이들 업종에서의 노동력 부족이 우려된다. 이 때문에 태국은 최근 최저임금 인상을 단행했다. 미 컨설팅 업체 유라시아그룹은 최근 보고서를 통해 “글로벌 기업들이 동남아시아에서 사업을 계속하려면 미얀마 근로자의 임금을 올려주거나 라오스나 캄보디아로 이전해야 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남윤선 한국경제신문 기자 inkling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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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독재에 항거한 자유의 투사
아웅산 수치 여사는 …

[Global Issue] '미얀마의 민주화'…수치 여사가 그 빗장을 열다
아웅산 수치는 1945년 6월19일 아웅산 장군과 그의 아내 킨치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웅산 장군은 미얀마 국민들에게 ‘국부’와 같은 존재다. 그는 1886년부터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얀마를 독립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나, 독립을 이룬 지 2년 만에 정적에 의해 암살당했다.

아버지 사망 후 1960년 아웅산 수치는 어머니를 따라 인도로 건너갔고, 30여년간 외국에서 생활하며 평범한 삶을 살았다. 영국인 마이클 에리어스와 결혼했고, 옥스퍼드대에서 공부했으며, 뉴욕에서 일했다.

그 사이 미얀마에서는 군부 독재 정권이 들어섰다. 아버지의 동료였던 네 윈은 1962년 쿠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군사정권의 탄압이 심해지자, 미얀마 국민들은 ‘영웅의 딸’을 찾았다. 하지만 아웅산 수치는 국민의 구세주가 될 생각은 없었다. 1988년 병환으로 쓰러진 어머니를 간호하기 위해 미얀마로 귀국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같은해 8월 미얀마에서는 전 국가적 민주화 운동인 ‘8888운동’이 일어났다. 군부는 총칼로 시민들을 무참히 진압했다. 누군가 시민의 대변인이 필요했다. 더 이상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던 아웅산 수치는 마침내 그해 8월26일 수십만의 시민들 앞에서 민주화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연설을 했다. 그 후 민주화 투사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군사정권은 1989년 아웅산 수치를 가택 연금했다. 이후 최근까지 사실상 억류 상태에 있었다. 1991년 전 세계의 지지 속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