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증 빠진 일본경제
# 만성 경제위기에 순응
[Cover Story] 의욕잃은 '만성 중증환자' … "뭘 해도 안되니 이대로 살자"
“일본의 진짜 위기는 초(超)저금리 상태에 안주해 있다는 점이다. 국채를 늘려도 금리가 안 오르니 재정은 방만해지고, 기업은 낮은 수익에도 생존이 가능하니 국제경쟁력을 잃고 있다.”

1980년대 미국마저 넘보던 일본이 추락하는 이유에 대해 도이 다케로 게이오대 교수는 ‘초저금리 원죄론’을 꼽았다. 비정상적으로 낮은 금리가 경제 활력은커녕 악착같이 노력하려는 의욕마저 잃게 만들었다는 얘기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일본은 한국이 따라잡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거대한 산이었다. 히지만 현재의 일본은 무력감과 꽉 막혔다는 의미인 ‘폐색감(閉塞感)’에 휩싸여 있었다. 작년 3·11 대지진은 이런 분위기를 가속화, 고착화시킨 계기가 됐다.

지난 7일 오후 10시30분, 도쿄 호텔방의 침대가 좌우로 흔들리며 다소 울렁증이 느껴졌다. 진도 3.0의 지진이었다. 이튿날 만난 일본인들에게 물어봤더니 한결같이 그게 뭐 대수롭냐는 반응이었다. 재난이 일상화된 터라 그저 순응하고 사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숙명론’이 대지진 이후 경제·사회 전반에도 똑같이 퍼져가고 있다는 점이다. 돈을 풀어 소비를 늘리고 경제를 회생시키기 위한 ‘제로(0)금리’ 정책은 벌써 만 10년이 흘렀다. 한 해 나라 예산의 48%를 빚을 얻어(국채를 발행해) 조달하는데도 연 1% 안팎인 낮은 국채 금리가 안 올라가니 괜찮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고 도이 교수는 진단했다.

세계가 보는 일본은 ‘만성 중증환자’다. 국가 채무는 국내총생산(GDP)의 200%가 넘고, 신용등급(AA-) 추가 강등 가능성도 예고됐다. 지난해 31년 만에 무역적자를 냈고, 소니 파나소닉 등 간판 전자기업들은 수천억엔대 적자 늪에 빠졌다. 국제금융시장에선 일본 국채 금리가 2~3년 내 급등할 것이란 경고가 잇따르고 있다. 만약 국채 금리가 연 3%로 뛸 경우 정부의 이자부담은 3배로 늘어나게 된다. 그럼에도 일본이 버티는 것은 국채의 95%를 일본 내 금융회사들이 사주기 때문이다. 그리스는 국채의 70%를 외국 자본이 보유해 국가부도 위기로 치닫는 것과는 다른 상황이다. 경제가 장기 침체되면서 일본의 정치권 산업계 국민 모두 뭘 해도 안 되니 ‘그냥 이대로 살자’는 기류가 팽배하다. 다케모리 ?페이 게이오대 교수도 “어떤 산업이나 큰 벽에 부딪혀 있고, 이제야 기업들을 합친들 기술력이 떨어져 (삼성전자 같은 경쟁기업을) 이길 수도 없다”며 일본시스템의 피로감을 걱정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65세 이상 고령자가 인구의 22.8%에 달하는 세계 최고령국이면서, 합계출산율은 1.39명에 불과하다. 복지를 현재 수준에서 더 늘리지 않더라도 해마다 복지비용이 1조엔(15조원)씩 불어나는 구조다. 다케이시 에미코 호세이대 교수는 “1억2800만명인 인구가 2050년이면 9700만명으로 줄어들 전망인데 이미 유권자들이 고령화돼 고령복지 삭감이 어렵다”고 말했다.

정파 이해에 따라 움직이는 ‘3류 불임(不妊)정치’는 암적인 존재다. 국민들은 정치에 대해 불신을 넘어 혐오하는 수준이다. 재정문제의 유일한 해법인 소비세 인상도 녹록지 않다. 노다 요시히코 내각은 5%인 소비세율을 2015년까지 10%로 인상한다는 방침이지만 반대 여론이 40%를 넘는다.

도이 교수의 추산에 따르면 국채 대신 세금을 거둬 재정을 충당하려면 소비세율을 지금의 5배인 25%까지 올려야 한다는 계산이다. 이케다 모토히로 니혼게이자이신문 논설위원은 “국가채무가 그리스보다 심각해 증세 외엔 답이 없는데도 여당인 민주당 내에도 반대세력이 있고, 소비세 인상안을 공약했던 자민당은 야당이 된 뒤 협상카드로 활용해 상황이 여의치 못하다”고 설명했다.

한국과의 경쟁에서 밀린 일본 기업들은 정치권에 엔고(엔화 초강세)와 비싼 전기료(한국의 3배), 세계 최고인 법인세(40%), 부진한 자유무역협정(FTA) 등에서 한국만큼만 해달라고 요구한다. 구보타 마사카즈 일본 경제단체연합회(게이단렌) 전무는 여기에다 탄소 감축비용, 경직된 노동시장을 합쳐 6중고(重苦)에 시달린다고 하소연한다. 하지만 이런 문제가 개선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고 있다. 정치는 막혀 있고 정부의 운신폭도 극히 좁기 때문이다.

일본 경제계가 한 가닥 기대를 거는 게 중국시장이다. 세구치 기요유키 캐논글로벌전략연구소 연구주간은 “중국에서 1인당 소득이 1만달러를 웃도는 도시가 베이징 상하이 등 19곳이고, 이들 도시의 인구는 일본 전체보다 많은 1억4034만명에 달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일본의 입장에서 중국은 경제의 탈출구인 동시에 안보의 위협 요인이다. 시라이시 학장은 “일본이 할 수 있는 선택은 커가는 중국과 교역을 확대하되 안보는 동맹국인 미국을 비롯해 한국 호주 인도 인도네시아 등과 관계를 강화하는 것뿐”이라고 지적했다. 일본이 한국과의 FTA에 목을 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도쿄=오형규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o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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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 포퓰리즘 기‘승’ … 한국과 닮은꼴

[Cover Story] 의욕잃은 '만성 중증환자' … "뭘 해도 안되니 이대로 살자"
일본의 여당인 민주당은 2009년 총선에서 이른바 ‘4대 퍼주기 공약’(고속도로 무료화, 자녀수당 지급, 고교 무상교육, 농가소득 보장)을 내걸어 정권 교체에 성공하며 포퓰리즘 전성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이런 복지 공약을 재원 부족으로 못 지키게 되자 지난해 총리와 당 간사당이 대국민 사과까지 했다.

이는 지금 한국의 정치권이 연출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정치권이 복지 개혁은커녕 눈앞의 표에 급급해 재원대책도 없이 포퓰리즘 공약을 쏟아내는 것까지 두 나라가 닮은 꼴이다.

연내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에선 신칸센 추가 건설 등 개발공약을 되살리고 있다. 물론 재원 대책은 거의 없다. 나오시마 마사유키 민주당 부대표는 “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복지제도를 유지하는 데 큰 돈이 들지만, 낭비요인을 없애고 명목 경제성장률(물가상승률+실질 경제성장률)이 2~3%가 되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디플레이션(물가 하락)으로 고전하는 일본에선 2%대 성장도 쉽지 않다.

사정이 이런데도 복지 삭감을 주장하는 정치인은 없다. 표도 안 되고, 고령 유권자로부터 역풍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도이 다케로 게이오대 교수는 “정치인은 복지 확대를 제안할 때 국민 부담(세금 증액)을 숨기거나 뒤로 미루고 급부(혜택)만 강조한다”며 “재정 건전성은 ‘부담하지 않는 자는 급부도 없다’는 원칙을 관철시킬 수 있느냐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정치인의 잣대는 ‘내가 하면 민생복지, 남이 하면 포퓰리즘’이다. 다케모리 ?페이 게이오대 교수는 “노다 요시히코 총리의 소비세 인상 선언은 용기 있는 태도”라며 “이제는 여야가 복지개혁 구상을 내놔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