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세금의 역사는 혁명의 역사… 지나치면 화 부른다
세금을 뜻하는 한자의 어원을 살펴보면 세금의 의미와 탄생이 쉽게 이해간다. 세금(稅金)의 세(稅)는 벼 화(禾)와 바꿀 태(兌)가 합쳐져 만들어졌다. 여기서 태(兌)는 ‘빼내다’의 뜻도 지닌다. 문자 뜻 그대로 사람들이 수확한 곡식 중에서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몫을 떼고 나머지를 관청에 바치는 것이 세금인 셈이다. 세금은 유목생활이 어느 곳에 정착해서 농사를 짓는, 보다 발전된 농경사회로 진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요 생산물인 벼를 비롯한 곡식으로 공동체 운영에 필요한 경비, 즉 세금을 납부한 것이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첫 부과

세금은 부족들이 서로 힘을 합쳐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면서 생겨났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다. 세금의 기록은 기원전 4000년께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처음으로 엿보인다. 점점 불어나는 세금을 일일이 기억할 수 없게 되자, 한 부족이 점토판에 세금의 모양을 대충 그려 기록으로 남겨놓은 것이다. 벼 모양을 그려놓으면 쌀로 세금을 냈다는 식으로 약속한 것이다. 세금의 기원과 문자의 탄생이 비슷한 것은 점토판에 기록한 모양이 나중에 상형문자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후 세금에 대한 기록은 곳곳에 등장한다. 세금이 점차 보편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에서 발견한,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 해독의 열쇠인 로제타석에도 세금과 관련된 내용이 새겨져 있다. 기원전 200년께 그리스인들이 이집트를 지배하면서 무거운 세금을 물리자 이에 반발한 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궁지에 몰린 왕이 밀린 세금을 면제해 주겠다고 약속하고 이를 돌에 새겨 증표로 남긴 것이 바로 로제타석이다. 로제타석에서 보는 것처럼 세금의 역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반란이나 민란으로 얼룩진 경우가 많다. 그릇된 세금은 백성들의 저항을 부르기 때문이다.

#세금갈등으로 탄생한 미국

근대 헌법의 효시가 된 영국의 마그나카르타도 세금을 걷는 징세권을 갖은 왕의 권리를 제한한다는 문서에서 비롯된 것을 보면 당시의 세금제도가 얼마나 문란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영국을 다스리던 존왕은 기사들에게 방패세를 물렸다가 귀족들과의 세력다툼에서 패해 ‘앞으로 귀족의 동의를 받아 세금을 거두겠다’는 서명까지 했다. 왕으로서는 중요한 권력을 잃었지만 이를 계기로 법의 규정대로 세금을 부과한다는 조세법률주의가 싹트기 시작했다. 프랑스 혁명도 루이 16세가 세금을 더 거두기 위해 삼부회를 소집한 것이 화근이 됐다.

영국은 1760년대에 접어들자말자 아메리카 식민지에 새로운 세금을 잇달아 부과했다. 1764년 설탕세법, 1765년 인지세법에 이어 1766년에는 타운센트조례까지 도입함으로써 식민지 주민들의 강력한 반발을 자초했다. 영국 재무장관 타운센트의 제안으로 1767년 만들어진 법률에는 뉴욕 식민지 의회의 권리 정지, 유리 납 도료 종이 차에 대한 과세, 영국에서 아메리카로 수출하는 동인도회사 차(茶·tea)의 수출세 면제 조항 등이 들어있었다. 하지만 주민들은 자신들의 대표가 참석하지 않은 의회에서 결정한 세금은 납부할 수 없다며 이 법안의 철폐를 주장하고 나섰다. 이에 영국은 식민지 주민들의 요구를 일부 받아들였지만 동인도회사에 차수출 독점권을 부여하고 차수출세를 면제하는 조항만큼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결국 격분한 주민들이 보스턴항에 정박 중인 동인도회사의 배 2척을 습격해 300여개의 차 상자를 바다에 내던졌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보스턴 차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자치정부를 수립한 식민지 주민들은 1776년 7월4일 드디어 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잘못된 세금에 맞선 주민들의 의지가 독립전쟁으로 이어져 결국 독립국가 미국이 탄생한 것이다.

#우리나라 세금기원은 …

우리나라는 고구려 때 기록에 세금에 대한 언급이 처음 등장한다. 밭의 비옥도를 여러 등급으로 나눠 각각 세금을 매긴 것이다. 우리나라 세금제도는 조(租) 용(庸) 조(調)가 핵심이다.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이 제도는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계속 이어졌다. 농지에 부과한 조(租)는 쌀로 징수했고, 호적에 등재된 16~60세의 남자에 매긴 용(庸)은 노동력으로 거둬갔다. 조(租)는 가구마다 부과해 영광굴비, 개성인삼, 강화화문석 같은 특산물로 세금을 내도록 했다. 이 중 세금의 주류는 지금의 소득세와 비슷한 조(租)였다. 19세기까지는 산업화가 전혀 이뤄지지 않아 농지에서 대부분의 소득이 발생했기 때문에 농지와 관련된 세금이 주류를 이룰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조·용·조도 서양과 마찬가지로 점차 과세기준이 모호해지면서 당초의 의미가 크게 퇴색했다. 결국 농민이 경작하는 토지에 매기는 세금인 전정(田政)과 군정(軍政), 환정(還政)이 부정부패로 얼룩지는 삼정의 문란이 초래됐다.

동학혁명을 비롯한 조선시대 민란들도 대부분 탐관오리들의 가혹한 징세가 원인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세금의 역사를 혁명의 역사라고 일컫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릇된 세금의 역사가 있었기에 올바른 세금제도의 탄생도 가능했다. 인류는 잘못된 역사를 고쳐가며 진화하기 때문이다.

신동열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shin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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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세· 수염세… 사역속 괴이한 세금들

[Cover Story] 세금의 역사는 혁명의 역사… 지나치면 화 부른다
역사적으로 기이한 세금도 많았다. 하지만 세금을 덜 내려는 인간의 생각 역시 기발하다. 영국의 윌리엄 3세 때 얘기다. 당시 소득세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소득세 부과에 부담을 느낀 윌리엄 3세는 창문에 세금을 물리기로 했다. 부유한 사람들은 창문이 많은 주택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창문세는 요즘 ‘부자세’와 비슷한 개념이었다. 하지만 부자들은 절세를 위해 창문을 막아버렸다. 17세기 네덜란드는 건물의 너비에 비례해 과세를 했다. 이에 맞서 당시 암스테르담 사람들은 절세용으로 건물을 높고 길게 지었다. 뛰는 자 위에 나는 자가 있었던 셈이다.

제정 러시아의 절대군주였던 표트르 대제는 한때 수염세를 부과했다. 그는 당시 유럽에 비해 경제적으로 상당히 뒤떨어진 러시아를 발달시키기 위해 유럽에 가장 가까운 네바강 하구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북유럽의 베니스라고 불리는 상트페테르부르크는 1712년 이렇게 탄생됐다. 그는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기고, 귀족들의 옷소매를 짧게 하고 긴 수염을 깎도록 했다.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의지의 표시였다. 하지만 귀족들은 긴 수염은 하느님이 주신 것이라면 강하게 저항했다. 표트르 대제는 한발짝 물러섰다. 수염을 기를 수 있도록 허용하되 수염세를 물리기로 한 것이다. 효과는 의외로 빨랐다. 수염세가 도입되자 세금을 내기 싫어하는 러시아인들은 너도나도 수염을 깎았다. 죽음과 세금의 공통점은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입증한 셈이다.

창문세· 수염세… 역사속 괴이한 세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