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괴담이 춤추는 사회
‘생각하는 사람’은 프랑스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1840~1917)의 대표적 작품이다.

우람한 근육에선 인간의 생동하는 육체적 에너지가, 고뇌하는 듯한 표정에선 인간의 깊은 사색이 느껴진다.

로댕보다 앞선 시대를 산 르네 데카르트(1596~1650)가 방법적 회의론 끝에 도달한 결론이자 존재인식(存在認識) 철학의 출발점인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와 묘한 오버랩을 이룬다.

사색에는 이성 합리 과학 논리 등이 스며있다. 원시의 인류가 문명의 인류로 진화한 것도 결국은 사색의 덕이다.

이성은 사색의 결과물이며, 유럽 르네상스는 활짝 꽃피운 인간 이성의 산물이다.

이성은 사물을 종합적이고 객관적으로 보는 힘이다.

이성의 자리를 극단적 논리나 개인적 고집이 지배하면 사물을 보는 시야가 좁아진다.

흑백논리자들은 토론보다 자극적인 문구나 슬로건에 더 의존한다.

최근 우리 사회에 떠도는 괴담은 이분법적 논리의 극단을 보여준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으로 맹장수술비가 900만원이 된다’ ‘FTA 땐 빗물을 받아 쓴다’ ‘수입쇠고기로 인간 광우병이 생긴다’ 등 괴담 수준의 근거 없는 소문이 떠도는 것은 우리사회에 민주적 토론 기반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괴담은 정치·경제·연예계를 경계 없이 넘나들며 확산된다.

‘괴담의 나라’를 만드는 본질은 불신이다.

괴담은 불신에서 뻗어나온 가지다. 불신이란 뿌리를 뽑아내지 않으면 괴담은 언제든 무성하게 가지를 뻗는다.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한·미FTA=식민지’라는 극단적 논리를 뱉어내는 정치권은 괴담의 싹을 틔우는 온상으로 꼽힌다.

FTA에 애국과 매국이라는 양분법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도 위험천만한 ‘준괴담’이다.

합리적인 정보가 매몰되면 왜곡과 괴담이 판을 치고 떠도는 허황된 얘기가 진실인 듯한 착각에 빠진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상징되는 뉴미디어 등장으로 괴담의 생성과 유포는 갈수록 빨라진다.

괴담은 거의 비용 없이 만들어지고 일부 괴담은 유권자들의 표심까지도 흔든다.

괴담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반복되면 민주적 절차의 정당성은 훼손된다.

침묵하는 다수가 목소리 큰 소수에 눌리면 그 사회는 점점 비민주적으로 변질된다.

소수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만 괴담까지 용인해서는 안되는 이유다.

건전한 토론문화가 자리를 잡으면 자극적 선동이나 괴담의 입지는 좁아진다. 정치인은 국회에서 머리를 맞대고 해법을 찾아야 한다. 정치인이 아니더라도 토론과 대화는 민주국가를 지탱하는 근본이다.

4,5면에서 우리사회에 떠도는 괴담들을 살펴보고 인터넷의 익명성이 갖는 장단점을 알아보자.

신동열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shin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