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상상력과 기술의 접목...인문학이 경영을 바꾼다
시장은 하루가 다르게 변한다. 기술이나 가격을 차별화하는 것만으로는 경쟁우위를 확보하기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인문학이 경영의 새로운 돌파구로 등장하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SERI)는 지난 8월 ‘인문학이 경영을 바꾼다’는 보고서를 통해 “최고경영자(CEO)가 경영에 인문학적 상상력을 결합, 원대한 꿈을 피력하고 비전을 제시하는 게 미래경영”이라며 “국내 경영자들도 인문학에 큰 관심을 보이는 추세”라고 밝혔다.

연구소가 SERICEO 회원 49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설문에 따르면 국내 CEO 97.8%가 ‘인문학적 소양이 경영에 도움이 된다’고 답했다.

인문학적 소양이 풍부한 사람을 채용할 의사가 있다는 답변도 82.7%에 달했다. 많은 기업들이 직원의 창의성과 커뮤니케이션 역량을 높이기 위해 인문학 접목을 시도하고 있다.

# 창의성과 인문학

기업들은 우선 조직의 창의성 제고를 위해 인문학을 활용하고 있다.

‘토이스토리’ ‘카’ 등의 애니메이션을 만든 미국의 픽사(Pixar)는 사내에 ‘픽사대학’을 개설하고 글쓰기·문학·철학·즉흥연극 등 100여개의 인문학 강좌를 운영하면서 직원의 창의성 배양에 힘쓴다.

픽사는 직원들에게 주당 4시간의 교육시간을 보장했다.

이러한 노력은 애니메이션 카의 시나리오 질을 높이는 성과로 이어졌다.

제작진은 미국의 66번 국도에 정통한 역사학자 마이클 윌리스와 함께 이 도로를 여행하면서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구글은 채용면접 때 “당신은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인문학적 상상력을 평가한다. 이 회사는 올해 신규 채용자 6000명 중 5000여명을 인문학 전공자로 충원했다고 발표했다.

그 밖에 IBM은 임원교육 과정을 인문학 중심으로 구성하고 고전을 읽은 뒤 기업의 변화방향을 제시하도록 하고 있다.

삼성전자 디자인경영센터에는 15%가 넘는 인문학 전공자가 있어 커뮤니케이션 매개 역할뿐 아니라 다양한 지식을 융합해 창의적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두바이의 CEO’로 불리는 셰이크 모하메드 국왕이 바다 위에 야자수 모양의 인공섬을 띄우고 사막에 실내 스키장을 세우면서 두바이를 중동의 석유수출국이 아닌 ‘즐길 거리’가 많은 도시로 탈바꿈시킨 원동력도 인문학이 배경이라는 분석이다.

# 미래예측과 인문학

세계 컴퓨터 CPU(중앙처리장치)시장의 절대 강자인 인텔은 인문학을 활용해 미래사회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급변하는 정보기술(IT)세계에서 미래에 대한 예측 없이 기술을 개발하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이다. 인텔은 미래 컴퓨터, 인터넷 모바일 기술의 발전 방향, 컴퓨터와 인간 간 소통방식 등을 연구하기 위해 ‘상호작용 및 경험’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연구소장은 IT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문화인류학 전공자다.

연구팀에는 엔지니어, 하드웨어 전문가뿐 아니라 인류학자, 심리학자, SF소설가까지 다양한 인문학 분야의 전문 인력이 소속돼 있다.

연구분야만 놓고 보면 IT기업의 산하 연구소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다.

야후도 네티즌들이 어떤 광고에 반응하고 클릭하는지 연구하기 위해 심리학, 문화인류학 등 인문학자들이 주축인 팀을 운영하고 있다.

IBM은 미래 전망을 위해 자연과학자, 공학도 이외에도 인문학자들이 포함된 전담부서를 운영한다.

이들 기업 모두 미래 IT 세상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 인문학 전문가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 마케팅과 인문학

다임러크라이슬러는 2000년 복고풍 왜건 자동차 ‘PT크루저’를 내놓았다.

시장은 이 차에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PT크루저는 엔진이 강력하지도 않았고 당시 유행하던 유선형 디자인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라이슬러의 마케팅팀은 인류학 전문가에게 의뢰해 자동차에 대한 미국 소비자의 무의식적 욕구를 분석했다.

그 결과 어린 시절에 본 머스탱이나 비틀 같은 독특한 자동차에 대한 동경과 자동차 열쇠를 받았을 때의 떨리는 해방감이 미국 소비자의 공통된 경험임을 확인했다.

이를 바탕으로 크라이슬러는 PT크루저의 디자인 컨셉트를 ‘독특하면서도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 차’로 잡았다.

전면부 그릴을 확대하고 후면부 창문 설계를 변경한 PT크루저는 알 카포네 같은 갱이 타던 클래식 카를 떠올리게 했다. 크라이슬러는 이후 5년간 100만대를 팔아치우는 대박을 터뜨렸다.

이는 제품에 대한 소비자의 태도와 동기를 연구해 이면에 숨겨진 역사적·문화적 배경을 해석하는 ‘민족지(ethnography)’ 기법을 경영에 활용한 경우다.

우리나라는 현대건설, 롯데백화점 등 몇몇 대기업에서 인문학 교육을 도입하고 있지만 아직은 미미한 실정이다. 사례에서 살펴본 것처럼 경영과 인문학의 접목은 지식의 접목이라기보다는 관점의 접목이라 할 수 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단순히 유행에 편승한 기법의 도입이나 일회성 이벤트로는 큰 효과를 거둘 수 없다”며 “임직원 교육, 연수에 인문학 교육 과정을 포함시켜 인문학에 대한 조직의 수용성을 증대하는 게 일단 숙제”라고 분석했다.

최만수 한국경제신문 기자 bebo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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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에서 배운 호암 이병철의 경영철학

삼성그룹 창업자인 고( 故) 이병철 전 회장의 일생을 상징하는 키워드는 논어(論語)다. 호암은 자서전을 통해 이렇게 술회한다.

“나라는 인간을 형성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은 바로 논어다. 나의 생각이나 생활이 논어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해도 오히려 만족한다. 논어에는 내적 규범이 담겨 있다.

법은 행위의 사후에 작용하지만 내적 규범은 인간사회의 규율에 적대하는 행위의 발생을 미리 막는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경영의 기술보다는 그 저류에 흐르는 기본적인 생각, 인간의 마음가짐에 관한 것이다.”

호암은 학습을 통해 성숙한 인격을 갖춘 인격자들이 이상적 태평성세를 이루는 주체가 돼야 한다는 유교적 가치관을 사업 이념에 대입했다.

그가 인생의 신념으로 여겨온 ‘사업보국’이나 ‘공존공영’의 도리는 공자가 말하는 ‘대동(大同)사회’와 결을 같이 한다.

개인윤리와 사회윤리의 조화라는 목표는 호암을 사업가로 키웠고 나아가 삼성이라는 기업의 정체성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삼성그룹 컨트롤타워(옛 전략기획실) 직원들이 최근 논어를 다시 읽는 것도 호암이 만든 뿌리 속에서 비전을 찾기 위함이다.

‘학(學)’으로 시작해 ‘지인(知人)’이란 단어로 끝나는 논어가 인재 중시와 미래 신기술 연구라는 그룹의 핵심가치를 잘 함축하고 있다고 삼성 관계자들은 전한다.

기업을 운영하려면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하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던 호암은 손자(이재용 삼성전자 사장)가 대학에 들어갈 때도 인문학(서울대 동양사학과)을 권유했다고 한다.

이 사장은 대학에서 공부한 인문학 지식을 바탕으로 일본 게이오대 대학원과 미국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