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경제가 성장해야 관용이란 미덕도 통한다
월스트리트를 비롯한 전 세계에서 시위가 확산되고 있는 것은 근본적으로 삶이 팍팍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삶이 고단해지면서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바라보는 시각도 왜곡된다.

제조업보다는 금융이라는 공룡이 글로벌 시장을 좌지우지하면서 경제에서 땀과 노력의 의미가 퇴색하고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사회적 분노가 표출되고 있다.

마치 현 경제위기의 주범이 자본주의 때문이라는 잘못된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분명 세계인의 삶을 풍요롭고 정신을 살찌운 경제원리다.

문제는 경제가 성장해야 삶이 풍요로워지고 관용이란 미덕도 확산된다는 것이다.

#의심 받는 '보이지 않는 손'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의 기본원리는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다.

영국의 고전파 경제학자인 애덤 스미스가 자신의 저서 ‘도덕감정론’(1759)과 ‘국부론’(1776)에서 단 한번씩 언급했지만 고전경제학은 물론 자유시장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명언이 됐다.

개인의 이기심에 입각한 경제적 행위가 결과적으로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에 이바지하며, 이런 사적 이기심과 사회적 번영을 매개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 각 개인이 자기의 이익을 뜻대로 추구하는 동안에 ‘보이지 않는 손’의 영향으로 예상치 못한 사회 전체의 이익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국민경제에 필요한 물자의 종류와 수량, 생산방법, 생산물의 분배 등을 시장자율에 맡기면 가장 합리적인 조화와 배합이 이뤄진다는 믿음이다.

시장자율의 기능을 신뢰하는 ‘보이지 않는 손’은 200년 넘게 자유시장경제 발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는 경제운용을 상대적으로 시장자율에 맡긴 서유럽이나 미국의 경제와 ‘보이는 손’으로 통제한 동유럽이나 옛소련의 경제를 비교하면 쉽게 이해가 간다.

하지만 세계경제를 ‘보이지 않는 손’에만 맡기기에는 그 규모가 너무 커지고 구조도 훨씬 복잡해졌다. 특히 탐욕이 지배하는 금융시장을 자율에 맡긴 결과는 혹독했다.

2008년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이 대표적 사례다. 그러나 ‘보이는 손’으로 시장을 통제하려는 것은 더 큰 문제를 야기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이나 유럽이 천문학적인 자금을 시장에 쏟아부었지만 시장의 갈증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특히 유럽은 정부가 개입해 보편적 복지를 확대했지만 결과적으로 경제는 더 어려워지고 사회도 더 혼란스러워졌다.

#관용은 곳간 채워진 이후에...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말은 경제와 사회현상의 핵심을 짚은 속담이다.

바람직한 사회는 물질적 풍요과 정신적 행복이 조화를 이룬 사회다. 물질이 부족한데도 행복한 삶을 사는 이야기가 가끔 매스컴에 오르내린다.

하지만 이런 스토리가 뉴스를 타는 것은 그만큼 물질이 채워지지 않은 행복이 어렵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현재의 물질적 삶에 만족하고 앞으로도 이런 풍요가 지속될 것이라는 믿음이 생기면 관용과 개방의 마음이 커진다.

경제성장이 관용적이고 도덕적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스 등 유럽에서 이민자와의 갈등이 증폭되고 시위가 빈번한 것은 내 곳간이 채워지지 않은 탓이다.

맹자는 항상(恒産)이 있어야 항심(恒心)이 있다고 강조했다.

일정한 생업과 자산이 있어야 올바른 마음가짐이 생긴다는 뜻이다. 물질적 풍요가 개인과 사회의 도덕적 가치를 오히려 훼손시킨다는 생각은 분명 오해와 착각이다. 극히 일부를 전체의 논리로 확산시키는 비약의 오류다.

최근 우리사회에 기부문화가 확산되고 있는 것도 궁극적으로 물질적 삶이 풍요로워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물론 물질과 도덕이 엇박자를 낸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금융산업이 급팽창하면서 월가는 풍요한 물질의 상징이었지만 여전히 도덕보다는 탐욕이 시장을 지배했던 것도 사실이다.

앨런 그린스펀 전 미 중앙은행(Fed) 총재가 1990년대 월가의 투기적 주식거래를 ‘비이성적 과열’이라고 표현한 것은 때론 물질적 풍요가 더 탐욕을 낳는 인간의 한계를 경고한 말이다.

기업가정신은 온데간데 없고 투기를 합리화하고 주가 끌어올리기에만 혈안이 된 월가에 대한 경종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런 경고와 경종이 ‘물질과 도덕의 어깨동무’를 부정하지는 못한다.

#갈등해소의 근본책은 성장

월가가 시위대에 의해 포위되고 분노가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일자리가 없는 절망감,미래가 없는 좌절감이 그들을 거리로 내몬다. 분노는 분노를 낳고 이성을 마비시킨다.

그들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이성을 회복시킬 해법은 뭘까.

그 해답 역시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속담이다. 그들에게 일자리를 안겨줘 좌절이 희망으로 바뀌어야 한다.

희망이 커지고 관용의 정신이 확산되는 더불어 사는 사회를 회복해야 한다.

사회가 제기능을 찾으면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믿음도 다시 생길 것이다.

일자리 창출의 핵심은 경제성장이다.

탐욕과 숫자로만 움직이는 경제보다는 인간의 노력과 땀으로 일구는 ‘건실한 경제’의 근본을 강화해야 한다.

자유와 낭만의 상징인 유럽이 경제성장이 멈추면서 어떤 사회적 대가를 치르고 있는지를 한번쯤 생각해봐야 한다.

월가에서 울려퍼지는 좌절의 외침이 주는 의미도 되새겨야 한다.

경제성장이 멈추면 사회적으로도 위기가 온다는 것은 역사가 수차례 입증한 진리다.

신동열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shin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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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은 금욕의 수단... 나태 예방에도 최선"

프로테스탄티즘과 직업윤리

막스 베버는 그의 저서《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프로테스탄티즘이 어떻게 서구사회의 과학,정치,수학 등의 발전에 기여했는지를 설명한다.

그는 자본주의 초창기 부유 계층으로 떠오른 자본가와 경영자, 장인의 대다수가 프로테스탄트였다는 역사적 사실에 주목한다.

베버는 ‘자본주의 정신’을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을 통해서 설명한다.

자본주의 정신이 나타나기 이전의 전통주의에서는 엄격한 가톨릭적 교리에 따라 ‘필요한 만큼만 벌고 쓴다’라는 금욕적 생활이 강조됐다.

하지만 자본주의 정신은 ‘직업’을 통한 합리적이고 지속적인 이윤의 추구를 허용했다.

이런 자본주의 정신의 등장은 자본가 계층의 자기정당화 근거로 작용했다.

이 과정에서 직업을 일종의 소명으로 간주한 프랑스의 종교개혁가 칼뱅의 직업의식이 결합했다.

칼뱅(그림)은 “금욕적인 생활을 통해 자신을 선택된 자로 확신하며 모든 유혹을 거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자기확신을 위한 소명으로서 직업에 종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구원을 위한 고행, 마법적 수단, 성례적 의식 등은 무의미하며 신의 은총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인간의 죄를 보상할 수 없다고 말했다.

칼뱅주의는 자신이 선택되었다는 확신으로 직업에 전념할 것과 근면 성실하고 건전하게 이윤을 추구하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

노동이란 금욕을 위한 수단이자 동시에 나태를 예방하는 최상의 방법이다.

직업과 노동을 중시하는 칼뱅주의는 합리적 이윤추구에 대한 윤리적 기반이 됐다.

최만수 한국경제신문 기자 bebo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