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버려진 외톨이가 세상을 바꾸다…삶이 곧 드라마


파란만장한 일생

1954년 시리아계 유학생인 압둘파타 존 잔달리는 미국 여성 조앤 캐롤 시블과 만나 사랑에 빠졌다.

둘은 곧 아이를 가졌지만 시블의 부모는 딸이 시리아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녀는 혼자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1955년 2월24일 아이를 낳았다.

흔하디 흔한 미혼모의 스토리 같지만 이때 태어난 아이는 이후 세계 정보기술(IT)과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바꾸고 많은 이들의 삶을 변화시켰다.

이름도 없이 태어난 이 아이는 1주일 만에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던 자동차 수리공 폴 잡스-클라라 잡스 부부에게 입양됐다.

잡스 부부는 이 아이에게 스티브 잡스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마운틴뷰로 이사갔다.

◆“누가 세상을 바꾸는가”

‘외톨이’‘고집불통’ 스티브 잡스의 어린 시절을 규정하는 키워드다. 외톨이인 그는 철저하게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몰두했다. 실리콘밸리라는 천혜의 환경이 그를 뒷받침했다.

열 네살 잡스가 주파수 측정기를 만들다 부품을 구하러 직접 HP 창업자인 빌 휴렛에게 전화를 건 일은 유명한 일화다. 잡스는 이 전화 한통으로 HP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잡스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등록금이 비싸기로 유명한 오리건주의 리드컬리지에 입학했다.

하지만 이마저 한학기 만에 그만두고 서체에 대해 탐구하고 명상과 선불교에 빠져들었다.

이 무렵 잡스는 자신이 입양됐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나는 누구인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수염을 기르고 누더기 옷을 걸치고 다녔으며 1년 내내 당근과 사과만 먹으며 채식주의자로 지냈다.

자신의 노력으로 한계가 있음을 안 그는 영적 거장들을 만나러 인도로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인도에서 발견한 것은 가난과 굶주림에 지친 비참한 삶이었다.

그때 그는 “세상을 바꾸는 것은 칼 마르크스나 님 카롤리 바바(인도의 영적 스승) 같은 사상가가 아니라 에디슨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21세에 애플 창업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단짝 워즈니악,친구 론 웨인과 함께 1976년 4월1일 애플을 설립했다.세계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 애플I을 그해 선보였고 1977년엔 애플II를 출시했다.

애플II는 투박한 기존 컴퓨터에 비해 크기는 절반으로 줄었고 소음 문제를 획기적으로 줄여 인기를 끌었다.

회사는 순탄하게 성장했지만 개인적인 삶은 행복하지 않았다.

그는 고교 시절 사귀었던 크리스 앤 브래넌이라는 여학생이 1978년 5월 아이를 낳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버지가 될 준비가 안 돼 있던 그는 딸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도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고 부인했다.

생부모를 모른 채 어린 시절을 보낸 그가 자신의 아이도 미혼모의 자식으로 만드는 상황이 된 것이다.

1980년 12월 애플이 상장되면서 750만주의 주식을 갖고 있던 그는 2억달러가 넘는 자산을 보유한, 미국에서 가장 젊은 억만장자가 됐다.

하지만 그는 워즈니악의 도움 없이 자신의 이름을 건 제품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이사회를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팀을 만들어 자신이 직접 개발한 첫 컴퓨터 리사(Lisa)를 출시했다.

이 컴퓨터는 자신이 부인했던 딸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나중에 딸의 존재를 인정한 것. 하지만 리사는 철저하게 실패했다. 그리고 애플 이사회는 잡스의 독단성이 회사를 망치게 될 것이라고 판단, 그를 해임했다. 1985년, 잡스가 애플을 만든 지 만 9년이 되던 때였다.

◆토이스토리로 재기

잡스는 애플을 나와 넥스트(NeXT)라는 PC 회사를 창업했다.

이 무렵 잡스는 하드웨어 분야에 대한 혁신을 고민하다가 조지 루카스 필름으로부터 애니메이션팀을 인수했다.

잡스는 원래 이 애니메이션팀이 그래픽 작업을 위해 만들고 있던 컴퓨터에 관심을 보였다.

잡스는 이 팀을 인수해 픽사(Pixar)라는 회사를 창업했다.

잡스의 생각과 달리 픽사가 만든 컴퓨터는 신통치 않았다. 이들의 애니메이션은 대단했지만 잡스는 하드웨어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1989년 잡스는 스탠퍼드 경영대학원을 다니던 로렌 파월과 만나 1991년 결혼해 아들 리드(Reed)를 낳았다. 회사가 점점 어려워지면서 잡스는 픽사를 정리할 생각까지 했다.

그때 디즈니의 투자를 받아 ‘토이스토리’가 나왔다. 1995년 11월 개봉한 토이스토리는 대박을 쳤다. 개봉 직후 픽사를 상장시킨 스티브 잡스는 또 다시 억만 장자가 됐다.

◆IT패권 장악…생부의 후회

이때 스티브 잡스가 떠난 애플은 IBM-마이크로소프트의 협공에 밀려 실적 부진에 빠져 있었다.

애플은 어려운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스티브 잡스의 넥스트 인수를 추진, 현금 3억7750만달러와 애플 주식 150만주를 스티브 잡스에게 주는 조건으로 넥스트를 인수했다.

스티브 잡스는 회사를 떠난 지 11년 만인 1996년 특별고문으로 애플에 복귀했다.

1997년 애플 대표이사가 된 그는 천재적인 디자이너 조너단 아이브를 영입해 제품 디자인을 완전히 바꿨다.

인터넷이 세상을 변화시킬 것을 예감, 인터넷의 첫글자 i를 딴 아이맥(IMac)을 차기 컴퓨터로 개발했다. 잡스는 최초로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를 없애고 CD롬 드라이브를 장착한 컴퓨터를 개발했다.

그는 1MB 용량의 플로피 디스크 대신 인터넷으로 파일을 전송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적중했다. 잡스의 첫 복귀작 아이맥은 한 달에 80만대가 팔리는 대형 히트작이 됐다.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던 잡스는 2004년 췌장암 판정을 받았다.

그리고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는다. 하지만 그는 주저앉지 않았다. 경영일선에 계속 머물면서 아이팟터치,아이폰을 잇따라 출시하며 전자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꿔버렸다.

그가 마지막까지 안고 있었던 짐이 있었다면 생부와의 화해였을 것으로 많은 사람들은 추측한다.

최근 스티브 잡스의 생부 잔달리는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잡스를 입양시킨 것을 후회한다”며 “잡스가 더 늦기 전에 연락해서 함께 커피라도 한 잔 한다면 행복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바람은 이뤄지지 않은 듯 하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일찍 스티브 잡스는 세상을 떴기 때문이다.

임원기 기자 wonk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