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레이건과 대처, 선진국 病을 바로잡다
"레이건과 대처는 정치적으로 결혼했다. "

(니콜라스 왑샷 더타임스매거진 편집장)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건 1975년이었다.

당시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은 캘리포니아 주지사 임기를 막 마친 상태였고,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는 보수당의 리더로 당선됐다.

미국의 한 후원자에 의해 우연히 만나게 된 두 사람은 처음 본 순간 같은 정치적 관점(보수)을 공유하고 있는 '물건'이라는 걸 알았다.

그들은 미국과 영국을 이끄는 지도자가 된 이후엔 밀어주고 당겨주는 정치적 동지로 발전했다.

강력한 리더십으로 1980년대 경제 성장을 이끌었고 시장경제를 회복시켰다.

당시 만연했던 '선진국병'(인플레이션과 과대 복지 등에 따른 저효율성)을 고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왑샷 편집장은 이들이 협력국 수장의 관계를 넘어 한 시대를 이끌었던 동반자였다는 점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 1980년대 미국, 최악의 경제

요즘 레이건과 대처가 다시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세계 1위 경제대국인 미국은 0~0.25% 초저금리를 유지하며 시장에 달러를 대거 풀었고,그 부작용으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돈을 풀었는데도 실업률은 고공행진 중이다.

이처럼 경제가 아주 어렵게 되자 위기를 극복한 레이건 전 대통령과 대처 전 총리의 지도력에 새삼 관심이 쏠리고 있는 것이다.

공화당의 레이건 전 대통령이 당선됐던 1981년 당시 미국 경제는 대공황 이후 최악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1980년 물가상승률은 12.5%에 달했고 실업률은 7.5%였다. 금리는 연 21%까지 솟았다.

통상 시장에 돈이 풍부할 때 물가가 오른다.

그런데 당시는 금리가 높아 돈을 빌릴 수 없어 시중에 유동성이 많지 않았는데도 물가가 오르고,경기 침체로 실업이 증가하는 스태그플레이션 상황이었다.

게다가 석유 파동이 있었으며 베트남 전쟁의 패배로 군 사기도 땅에 떨어졌다.

이 상황에서 레이건이 외친 것은 '강한 미국'이었다.

영국 토리당의 대처 전 총리가 당선됐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집권당이었던 영국 노동당은 복지를 늘렸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표방한 정부 정책은 연금과 무료 의료 혜택은 물론이고 결혼 · 임신 · 과부 · 장례수당까지 지급했다.

대처가 당선됐을 때인 1979년엔 영국 재정규모 중 복지 예산은 무려 47.5%였다.

이러니 일할 의욕은 사라지고 노동자들의 생산성이 떨어지면서 영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960년대 세계 9위에서 1970년대 중반 18위로 추락했다.

파업은 일상사가 됐으며 파업이 일어날 때마다 임금을 올려주니 물가도 뛰었다.

부실 기업은 국영화돼 국민 세금이 수혈됐다.

과도한 사회복지와 노조의 막강한 영향력으로 인한 고임금,생산성 저하 등 고복지 · 고비용 · 저효율로 대표되는 '영국 병(British disease)'이 만연한 것이다.

# 감세·작은 정부 등으로 경제회생

두 지도자는 각각 레이거노믹스(레이건+이코노믹스)와 대처리즘(대처+'사상'을 뜻하는 접미사 -ism)으로 국가를 이끌었다.

이름은 다르지만 이 두 사람의 정책 기조는 △감세 △규제 철폐 △작은 정부 △민영화 △법과 원칙에 따른 노사관계(노동 유연성 제고) 등이 핵심이었다.

레이건 전 대통령 집권 이후 1981년 10% 이상이던 물가 상승률은 1983년 4% 이하로 떨어졌다.

폴 볼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강력한 통화긴축으로 물가를 잡았다.

또 레이건 전 대통령은 1980년 70%에 달했던 최고 소득세율을 1986년 28%로 낮췄다. 법인세는 48%에서 34%로 내렸다.

비국방분야 재정지출도 1980년 GDP의 4.7%에서 1988년 3.1%로 줄였다. 항공과 금융 분야에서 규제를 철폐했다.

대선 때 그를 지지해준 항공관제사 노조가 파업을 하자 업무 복귀를 거부한 1만1345명을 법에 따라 전원 해고했다.

대처 전 총리는 국영기업을 민영화했으며 소득세 최고세율은 80%에서 40%로 낮췄다.

마틴 펠트스타인 하버드대 교수(경제학)는 "대처 집권 전엔 소득세에 투자소득세까지 더하면 최고세율이 95%에 달했다"고 설명했다. 대처의 노동시장 개혁은 석탄노조와의 싸움으로 대표된다.

그는 길고 긴 싸움 끝에 '제왕(帝王)' 같던 노조위원장 스카길을 항복시켰다. 1984년 3월 석탄노조는 파업에 들어갔다.

국영석탄공사가 구조개혁의 일환으로 탄광 20개소를 폐쇄 · 통합하고 직원 2만명을 감원한다는 계획을 노조 측에 제시한 것이 발단이었다.

스카길은 전국적 파업 전술을 채택했다.

12만명의 노조원이 참여한 이 파업은 363일 만인 1985년 3월 정부 측의 승리로 끝났다.

1974년 파업을 통해 당시 보수당 히스 정권을 무너뜨린 스카길이 마침내 법과 원칙을 앞세운 '철의 여인' 대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만 것이다.

# 평범한 아들·딸이 국가 이끌다

레이건은 알코올 중독증에 걸린 아버지 밑에서 외롭게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일을 구하기 위해 계속 떠돌아다녔다. 레이건은 외로움 속에서도 꿈을 잃지 않고 할리우드 스타로 컸으며,이후 공화당 대선주자로 떠올랐다. 대처도 장학금으로 학비를 겨우 댔던 고학생이었다.

옥스퍼드대 사교 클럽에서 가입을 거부당한 적도 있었다.

보수당 초기 시절엔 당 모임에 끼지도 못했고 당의 중견 간부가 됐을 땐 회의실에서 유일한 여자로서 소외감을 느껴야 했다.

두 사람의 리더십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레이건은 '소통의 달인'으로 불린다.

그는 정치적으로 반대 성향을 지닌 이들까지 소통을 통해 끌어안았다.

반면 대처는 물불 가리지 않고 공격적으로 밀어붙이는 스타일이었다.

강유현 한국경제신문 기자 yhkang@hankyung.com

---------------------------------------------------------

'자유주의'의 철학적 뼈대 세운 하이에크


[Cover Story] 레이건과 대처, 선진국 病을 바로잡다
영국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August von Hayek)는 20세기 자유주의와 시장경제의 기초를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가 주장한 자유주의는 1930년대 대공황 이후 프랭클린 루스벨트 당시 미국 대통령이 정부 사업을 통해 일자리를 늘리는 '뉴딜정책'을 펴면서 정부의 시장 개입을 옹호하는 케인스주의에 묻히는 듯했다.

그러나 1970년대 인플레이션 등 정부 개입주의의 병폐가 드러나면서 다시 자유주의가 주목받기 시작했고 그는 1974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

하이에크는 '자생적 질서'라는 개념을 통해 자유주의와 시장경제를 옹호한다.

그의 마지막 저서인 《치명적 자만》은 '본능과 이성의 사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한다.

그는 이 책에서 '자연적 질서'와 '인공적 질서'라는 전통적인 이분법을 넘어 '자생적 질서'라는 제3의 질서가 있다고 밝힌다.

자연적 질서는 본능에 의존한,생물학적 진화의 산물로서의 질서다.

'인공적 질서'는 이성이 만든 질서,설계된 질서로 사회주의 국가의 계획경제가 여기에 속한다.

그러나 인류 사회는 이 두 가지 유형에 포함되지 않는 또 다른 질서를 가지고 있다.

언어,도덕,법률,시장과 같이 본능과 이성 사이에서 그 상호 작용을 통해 형성된 문화적 진화의 산물인 자생적 질서가 그것이다.

자생적 질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게 시장 질서이며,'정당한 분배'를 추구하는 모든 노력은 자생적 시장질서를 전체주의적인 질서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하이에크는 사회주의가 외치는 자유로 가는 길이 사실은 자생적 질서를 해쳐 예속으로 가는 첩경이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