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정치의 3대 축은 '反日 · 反共 · 自主'

"일본과 화동(和同)하여 국가의 독립과 자유를 발전케 하겠다든가 또는 공산당과 싸우지 않고 평화적으로 통일을 하겠다든가 하는 것은 다시 국권을 일본에게 빼앗겨도 좋다는 것이고,또 소련을 조국이라고 하는 유의 언동이다.

" 81세 생일을 막 넘긴 노 대통령 이승만은 1956년 5월 대전역에서 자신의 세 번째 대권을 위한 유세를 가졌다.

이 연설에서 읽을 수 있듯이 그의 오랜 정치역정은 반일,반공,자주노선이라는 세 가지 큰 기둥이 떠받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정치의식의 출발점-민주주의

[Cover Story] '건국 대통령' 이승만을 다시본다
이승만은 조선 왕족의 후손(양녕대군파 15대손) 출신이었지만,무력한 왕조와 당시 고종황제에 대해 철저히 부정적이었다.

배재학당 재학(1895~1897년) 중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에 연사로 활동하는 등 적극적이었으며,구국운동을 위한 협성회를 주도했다.

왕조에 대한 그의 반감은 '이승만이 왕정을 타도하려 한다'는 소문을 낳기도 했으며,배재학당 졸업 후인 1899년 고종 폐위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4년반 동안 투옥됐다.

출옥 후 독립 지원을 얻기 위한 밀사로 미국에 파견되는데,이때도 '허약한 겁쟁이 임금과는 상종하지 않겠다'며 궁녀가 들고온 밀지를 거절할 정도였다.

밀사활동이 실패로 끝난 뒤 미국 잔류를 결정한 그의 정치적 의식을 채운 것은 민주주의였다.

3 · 1 운동 직후 해외에서도 독립열기가 고조되던 당시 미국 정치의 고향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서 그는 '한국이 독립하면 기독교국가를 건설하고 미국식 민주제를 시행하겠다'고 선언했다.

미국식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동경은 민주주의 토양이 척박했던 이 나라의 건국의 토대가 됐다.

그러나 장기 집권을 위한 민주원칙 훼손과 부정선거,그로 인한 초대 대통령 하야라는 불명예는 오점으로 기록됐다.

⊙ 철저한 반공노선

해방정국 초기만 해도 이승만은 좌우합작에 유연한 자세를 취했으나,친일파 처리 등을 둘러싼 박헌영과의 논쟁을 계기로 완전히 반공노선으로 돌아섰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그의 반공철학은 상당히 오래전에 형성됐다는 게 정설이다.

초기 상하이 임시정부의 방침은 외교활동을 통해 독립을 기한다는 것이었고,이에 따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임했다.

그가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한 윌슨 미국 대통령과 사제지간의 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임시정부에서 이동휘 등의 사회주의 무장독립노선과 대립하였고,이 때문에 그가 상하이를 떠나 미국에서 활동하게 됐다고도 한다.

그의 반공노선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본격적인 반소련주의로 나타난다.

임시정부 대표로 미 국무부와 접촉하던 그는 소련의 한반도 점령을 강력 경고하는 한편 반소연합전선을 제안하였다.

대일본전쟁에 참전할테니 임시정부를 승인해 달라는 것이었지만,끝내 성공하지는 못했다.

특히 얄타회담에서 미국이 소련에 한반도를 양보했다는 정보를 접한 뒤 그는 소련을 맹비난하고 나섰다.

그의 반소노선은 워낙 철저한 것이어서,소련의 대일전쟁 참전을 이끌어내려는 미 국무부가 걸림돌로 여길 정도였다.

이 때문에 그는 국무부의 기피인물이 돼 해방 직후 귀국여권을 한동안 발급받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

이승만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승공통일 멸공통일 원칙을 세우고 여기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미국이 휴전방침을 결정하자 이에 반대해 독자적으로 반공포로를 석방한 사실에서도 무력통일에 대한 그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 자주노선-미국과 치열한 밀고당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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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국제 정세를 읽고 판단하는 정치감각은 대단히 현실적이었다.

1939년 세계대전 발발 가능성이 짙어질 무렵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에 보낸 편지에서 한국인과 중국인이 국제 정세에 몽매함을 지적하고 한국의 독립에는 미국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의 대미관계는 일방적이지 않았다.

1905년 독립호소를 위한 밀사로 미국에 도착한 그를 기다린 것은 가쓰라-태프트밀약이었다.

미국은 필리핀을,일본은 한반도를 차지하는 데 서로 양해한다는 내용이었다.

밀약의 정체를 알게 된 그는 강대국이 어떤 속셈을 하고 있는지 뼈저리게 느끼게 됐다.

미국에 대한 의구심은 그후에도 계속됐다.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소련의 입장을 고려,임시정부 승인을 미루고 회피하는 미국 정부를 그는 깊이 불신했다.

또 해방정국에서는 미 군정과 끊임없이 밀고당기기를 하는 배경이 됐다.

한국전쟁을 전후해서는 미국이 주한미군을 철수한 것이 전쟁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확신했으며 북진통일 문제를 놓고는 미국과 정면 대립하는 상황까지 갔다.

물론 전후에 미국을 불신하면서도 한 · 미 상호방위조약 체결로 강력한 동맹관계를 유지한 것 역시 현실적인 정세 판단이었다.

⊙ 반일(反日)정책-복합적인 결과

청년 이승만을 정치인생으로 이끈 첫 계기는 명성황후 시해사건(1895년)이었다.

사건 후 연금 상태에 있는 고종의 탈출을 도와 원수 일본에 복수하겠다는 모의는 사전 발각돼 실패했지만,이는 이승만의 인생을 결정짓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 사건의 경험은 바로 만민공동회와 협성회를 통한 애국계몽활동으로 발전했고,이후 미국에서의 독립외교의 밑거름이 된다.

1948년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연호를 채택,대한민국 30년으로 정했다.

상하이 임시정부 법통을 그대로 잇겠다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대일배상금 지급을 요구하고,대마도는 우리 땅이라며 반환도 요구했다.

일본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에는 기본적으로 일본이 한반도를 다시 침략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깔려 있었다.

한국전쟁 때 1 · 4후퇴로 전황이 급박해지자 맥아더 사령부가 구 일본군의 참전을 검토한다는 설이 나돌았다.

그러자 그는 바로 성명을 내고 "일본군이 한반도에 들어온다면 그쪽부터 먼저 축출하겠다"고 강하게 나서는 바람에 없던 일이 됐다.

전후 물자가 없던 시절 일본제 상품이 물밀듯 들어오자 수입금지 조치를 내리기도 했다.

집권 말기에는 한 · 일 수교 전제조건의 하나로 약탈문화재 반환을 요구했고,재일교포 북송사업이 시작되자 '사실상 추방조치'라며 강력하게 비난하며 송환저지 공작활동을 펴기도 했다.

이승만의 반일정책 중 가장 회자되는 것이 이른바 이승만 라인(평화선)이다.

1952년 독도를 포함한 60해리 수역의 배타적 주권선을 설정한 것이다.

당시 동해상에서 불법어로를 하는 일본 선박을 엄격하게 단속하면서 일본의 반발을 불렀지만 이승만은 꿈쩍도 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는 강력한 반일노선에 걸맞지 않게 친일전력 인사들을 건국 과정에서 대거 기용했다.

이들 중 많은 이가 권력을 남용함으로써 그에게 실정(失政)의 오명을 남기게 됐다.

우종근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rgbac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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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부패한 독재자?… 시장 경제와 민주주의 주춧돌 놓았다!


[Cover Story] '건국 대통령' 이승만을 다시본다



"정치적 야욕에 사로잡혀 민족의 기대를 저버린 부정의 독재자."

"건국의 아버지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주춧돌을 놓은 지도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은 이처럼 극명하게 엇갈린다.

전혀 상반된 평가가 나오는 것은 보수와 진보로 갈라져 갈등을 빚고 있는 한국의 현 정치상황과도 관련이 깊다.

이런 분위기 속에 4 · 19혁명 51주년을 맞아 이승만을 좀 더 객관적이고 올바르게 평가하려는 시도도 나타나고 있다.



⊙ 고교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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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 미 군정(軍政)은 식민지 경제구조를 대신해 남한 사회에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도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시장경제 체제의 졸속 도입은 유례없는 식량위기를 불러일으켰다.

… (중략) …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에서 자신들의 세계 정책에 적합한 정부를 세우고자 했다. 이에 대해 남북의 정치 지도자들은 통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이를 이용하기도 했다.

이승만은 제 1차 미 · 소 공동위원회가 중단되자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

금성출판사가 펴낸 '고등학교 한국 근 · 현대사'의 한 대목이다.

시장경제의 도입은 잘못된 것이며,이승만에게 남북 분단의 책임이 있는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지난해 교육과학기술부의 검정을 거쳐 올해부터 사용되고 있는 6종류의 고교 한국사 교과서 중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이 독립협회 활동을 하다가 5년간 감옥 생활을 했으며,미주(美洲)를 중심으로 오랫동안 독립운동을 펼쳤고 상하이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을 지냈다는 사실을 제대로 밝히고 있는 책은 두 종류뿐이다.

국사편찬위원회가 펴낸 고등학교 국사책도 이승만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신념을 가진 지도자라기보다는 노골적인 부정선거를 자행한 독재자라는 데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 386 세대의 이승만관(觀)

이같은 역사 해석은 현재 우리 사회의 중 · 장년층인 '386 세대'로부터 이어져온 것이다.

386 세대가 대학을 다닌 1980년대는 한국 현대사 연구의 전환기였다.

미국 시카고대 석좌교수인 브루스 커밍스와 그가 쓴 '한국전쟁의 기원'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분단과 한국전쟁의 기원을 새롭게 보려는 연구가 붐을 이루었다.

1980년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소망이 닮긴 '서울의 봄'이 지나가고 또다시 군사독재 정부가 들어서면서 반미 물결이 일기 시작한 시대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현대사에 대한 다시 보기 열기가 뜨거웠다.

이 과정에서 분단과 전쟁의 책임을 북한과 김일성에서 찾던 전통주의(traditionalism)는 쇠퇴하고 미국과 남한(이승만)에 더 많은 책임을 지우는 수정주의(revisionism)가 등장했다.

수정주의는 미국 및 군사 지배세력에 대한 사회적 반감과 어울어지면서 상당한 호응을 불러일으켰으며 이후 한국 현대사 연구의 주도권은 '커밍스의 아이들'에게 넘어갔다.

386 세대들은 교육과 학원,대중매체,생활현장에서 이 같은 수정주의적으로 해석된 한국 현대사를 젊은 세대들에게 급속하게 확대 재생산시켰다.

이들에게 한국 현대사는 반민중,반민족,반민주의 역사로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말한 부끄러운 역사이며,지우고 싶은 대상일 뿐이었다.

1990년대 들어와 국내적으로 민주화가 진척되고 국외적으로는 소련과 동구권이 무너지면서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 민주화와 탈냉전의 흐름을 역사 연구에 반영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이들은 6 · 25가 한반도의 공산화를 겨냥한 북한의 남침에서 비롯됐다는 옛 소련과 중국의 한국전쟁 관련 자료를 바탕으로 분단과 전쟁의 책임을 미국과 이승만에게 돌리는 불균형을 어느 정도 시정할 수 있었다.

⊙ '독재자'에서 '건국의 아버지'로

한국전쟁 이후 이승만 대통령이 장기집권을 모색하면서 독재정치를 행한 것은 사실이고 비판받아 마땅하다.

1954년 초대 대통령의 대통령 선거 출마 제한을 없애자는 내용을 담은 국회의 개헌안 찬반 투표에선 가결 정족 수에서 1명이 모자란 135명이 찬성 투표를 했는데도 이승만이 이끄는 자유당은 개헌안의 통과를 선언했다.

가결에 필요한 재적 국회의원 203명의 3분의 2인 135.333에서 소숫점 이하의 숫자는 1인이 되지 못하므로 사사오입해 135명 이상만 되면 개헌안은 통과된 것으로 봐야 한다는 논리를 들고 나왔다.

하지만 이런 잘못만으로 그의 공을 깎아내리는 건 온당하지 않다.

이승만은 무엇보다 해방 공간의 대혼란을 수습하고 공산주의에 맞서 자유민주국가를 세웠으며 시장경제의 주춧돌을 마련했다.

그는 1947년 7월24일 대통령 취임식에서 "이북 동포 중 공산주의자들에게 권고하노니 우리 조국을 남의 나라에 부속하자는 불충한 사상을 가지고 공산당을 빙자하여 국권을 파괴하는 자들은 우리 전 민족이 원수로 대우하지 않을 수 없다"고 경고하는 등 강력한 독립국가 의지를 피력했다.

유영익 한동대 석좌교수는 "1945년 말 미국 영국 소련 등 외무장관이 모인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에 따라 5년 신탁통치를 받아들일 생각이었던 미국의 구상을 무산시키고 건국을 관철해낸 것은 이승만이라는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그가 없었다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지금과 같은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6 · 25전쟁 후 미국을 설득해 한 · 미 상호방위조약을 맺은 것도 중요한 공으로 평가할 수 있다.

1953년 2월 미국에선 아이젠하워가 새로운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한국전쟁의 조기 해결을 공약으로 내걸고 휴전을 추진하던 그에게 휴전반대와 북진통일을 외치는 이 대통령은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다.

이승만은 휴전 협상에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우려한 미국 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2만7000명의 반공포로를 전격적으로 석방시켰다.

미국은 골칫거리인 이승만 대신 다루기 쉬운 사람을 남한의 새 지도자로 내세우기 위해 비록 실행엔 옮기진 않았지만 이승만 정권 전복 작전을 담은 '에버레디 계획(Plan Everready)'을 만들기도 했다.

한국전쟁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백선엽 장군은 "미국은 애초에 맺을 생각이 없었던 한 · 미 상호방위조약을 이 대통령의 강력한 요구로 마지 못해 응했다"며 "이 조약은 그 뒤 대한민국 번영의 틀을 형성했다"고 말했다.

이승만은 또 농지개혁과 양반제도 근절,남녀 평등,의무교육,현대적 군대 육성 등 경제와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는 초석을 쌓았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은 전하라는 단어를 좋아했고,왕처럼 대접받고자 했다.

제왕적 대통령이기를 원했던 그를 미국민들은 건국의 아버지로 부르며 존경한다.

이인호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은 "건국 대통령에 대해 그 나라 국민들이 느끼는 자긍심은 국민들 스스로가 느끼는 자긍심과 같은데 우리는 거꾸로 폄하의 길을 걸어왔다"고 강조했다.

작고한 김일영 전 성균관대 교수는 저서 '건국과 부국'에서 "역사는 앞선 세대의 삶의 발자취이며 '아버지'를 부정하고 지우려만 해서는 발전이 없다"고 충고했다.

대한민국 건국 60여년이 지나고 4 · 19혁명으로 하야한 후 망명지인 하와이에서 눈을 감은 지 46년이 지난 지금 이제 이승만 대통령의 역사적 공로와 과오를 냉철히 재평가해 한국 현대사에서 제자리를 찾도록 하는 게 필요하다.

강현철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hc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