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건국 대통령' 이승만을 다시본다
영국의 정치학자이자 사학자인 E.H.카에 따르면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역사가 고정되고 죽어있는 단순한 과거의 사실이 아니라 현재의 상황이나 시대적 과제에 따라 끊임없이 재해석되는 살아있는 무엇이라는 얘기다.

카의 주장은 역사에서 우리가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설득력이 있다.

해마다 진달래 꽃이 산야를 뒤덮을 때면 4 · 19를 맞는다.

51주년인 올해의 4 · 19는 특별했다. 건국 대통령인 이승만 박사의 양자인 이인수 박사와 이 대통령 기념사업회 회원들이 서울 수유리 4 · 19 묘역을 찾아 희생자와 유족에게 사죄의 뜻을 밝혔기 때문이다.

비록 유족들 가운데 일부가 사과를 받아들이진 않아 묘역 참배는 무산됐지만 이번 사죄는 이승만을 둘러싼 역사적 논란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다.

사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오랫동안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이기보다는 '독재와 부정(不正)의 정치인'이었다. 해방 후 남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함으로써 남북을 분단시킨 장본인이었으며,사사오입 개헌과 부정선거로 장기집권을 꾀한 독재자로 지목돼 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우리처럼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나라가 거의 없는데도 이승만과 박정희의 현대사를 공개적으로 부끄러운 역사로 규정했다.

김영삼 · 김대중 기념관은 있고 박정희 기념관도 세워지고 있지만 이승만 기념관은 아직 없다.

그의 유물은 아무도 찾는 이 없이 서울 종로구 이화동에 있는 이화장(梨花莊)의 낡은 기와집에서 50여년을 견뎌왔다.

이승만은 독재자이며 남북 분단의 원흉이라는 시각은 1980년대 대학생들 사이에 풍미한 '해방전후사의 인식(해전사)'에서 상당 부분 비롯됐다.

해전사는 이승만을 자신의 정치적 야욕을 위해 남한 단독정부를 세워 국토를 분단시키고,북한과 달리 농지개혁도 철저하게 시행하지 않았으며,국민들을 억압한 독재자로 평가했다.

당시 군사정부의 강압적 통치는 대한민국 건국의 뿌리를 만주의 항일운동과 좌파의 독립운동에서 찾고,6 · 25를 공산화를 겨냥한 북한의 침략에서 비롯된 전쟁이라기 보다는 민족통일을 위한 남북간 내전으로 규정하는 해전사에 열광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건국 60년이 넘으면서 이승만에 대한 인식도 달라지는 양상이다.

해방 후 공산주의에 맞서 남한에 민주주의 정부를 세우고,시장경제를 받아들여 근대화의 기초를 다진 지도자라는 평가가 나타나고 있다.

사실 해방정국은 격랑의 시대였다.

일본 압제에서 벗어난 국민들은 대부분 민주주의나 공산주의가 무엇인지도 잘 몰랐고 시장경제나 계획경제에 대해서도 거의 알지 못했다.

소련과 중국에선 공산주의 물결이 거셌으며 그 파고는 한반도에까지 몰아닥쳤다.

소련은 김일성을 앞세워 북한에 공산정권 수립을 착착 진행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의 나라를 세운 것이다.

역사에 있어서 가정이라는 건 무의미하지만 만약 남한에도 공산정권이 수립됐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대한민국도 지금의 북한처럼 사상 최악의 인권과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 수준의 최빈국에서 허덕일 것이다.

4,5면에서 이승만은 누구이고 어떤 역할을 했는지,그리고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자세히 알아보자.

강현철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hc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