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의 행동이 늘 합리적인 건 아니다"
◎ 콩도르세의 '투표의 역설'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폴리스에서 유래된 민주주의(Democracy)는 그리스어 데모스(Demos · 시민)와 크라티아(Kratia · 권력 또는 지배)의 합성어인 데모크라티아(Democratia,시민에 의한 지배)가 그 어원이다.
왕이나 귀족이 아닌 시민이 주권자가 돼 스스로를 통치한다는 뜻이다.
철학자인 칼 포퍼는 "민주주의는 피를 흘리지 않고 선거를 통해 정부를 갈아치울 수 있는 체제"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출발부터 몇 가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먼저 꼽을 수 있는 게 우민(愚民) 정치의 가능성이다.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국가의 운영은 매우 전문적인 일로 철인(哲人 · 진리를 아는 소수의 엘리트)에게 맡겨야 한다며 시민들이 광장(아고라)에 모여 나랏일을 결정하는 것은 대중정서에 휩쓸려 잘못된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중앙집권적 정치 행위를 지양하고,평범한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통해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을 변화시키려는 풀뿌리 민주주의도 자칫 포퓰리즘(대중 인기영합주의)으로 전락할 위험을 갖고 있다.
또 하나는 보다 근본적인 것으로,다수결 의사결정이 갖고 있는 결함이다.
예를 들어 한 회사 인사부 부원 세 사람이 저녁 식사 장소를 정한다고 하자.
일식,한식,중식 가운데 한 군데를 골라야 하는데 세 사람의 취향은 서로 다르다.
신입사원은 일식을 한식보다 좋아하고,중식보다는 한식을 더 좋아한다. 순서대로 쓴다면 일식>한식>중식이다.
반면 대리는 중식>일식>한식,과장은 한식>중식>일식의 선호도를 갖고 있다고 하자.
세 사람이 투표로 회식 장소를 고른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일식을 한식보다 좋아하는 사람이 둘이고,한식을 중식보다 좋아하는 사람도 둘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중식이 일식보다 좋다는 사람도 둘이나 된다.
다수결의 원칙에 따르자면 한식과 일식 가운데서는 일식을,중식과 한식에서는 한식을 선택하게 된다.
그런데 다시 일식과 중식을 놓고 보면 중식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다수결의 결과 한식>중식>일식>한식이라는 모순이 나오게 돼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민주적 선택이 합리적 결과를 가져올 수 없는 셈이다.
이처럼 다수결을 통해 이행성(transitivity)이 있는 사회적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는 현상을 프랑스의 정치이론가인 콩도르세의 이름을 따 '콩도르세의 역설'(Condorcet's paradox) 또는 '투표의 역설'(voting paradox)이라고 부른다.
이행성(일관성)이란 A를 B보다 좋아하고 B를 C보다 좋아하면,반드시 A가 C보다 선호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국가 대사를 결정하는 투표를 할 때마다 국민들의 선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면 합리적 의사결정은 요원할 것이다.
◎ 애로의 '불가능성 정리'
1972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케네스 애로는 더 나아가 아예 민주주의가 전제로 하는 합리적 의사결정이 불가능하다는 걸 수학적으로 증명했다.
1951년 '사회적 선택과 개인의 가치'라는 논문에서 다수결에 따른 의사결정이 결코 합리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밝힌다.
이를 '애로의 불가능성 정리(Arrow's Impossibility Theorem)'라고 한다.
애로는 이상적인 투표제도에 의해 결정된 선택은
△만장일치의 원칙(모든 사람이 A를 B보다 좋아하면 선거에서 A가 B를 이겨야 한다)
△이행성의 원칙(A가 B를 이기고 B가 C를 이기면 A가 C를 이겨야 한다)
△무관한 대안으로부터 독립의 원칙(A와 B 사이의 우선순위는 무관한 제3의 대안 C의 존재에 의해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
△독재자 부재의 원칙(다른 사람의 선호와 무관하게 항상 자기의 뜻대로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 등의 속성을 가져야 하는데 어떤 투표제도도 이 같은 속성들을 모두 만족시킬 수 없다는 걸 입증했다.
투표 제도가 사회적 선택 수단으로 완벽하지 못하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회식 장소를 정하는 위의 사례에서 결정은 오직 독재자의 의사대로 처리할 경우에만 가능하다.
가장 지위가 높은 과장 마음대로 식당을 정하는 것이다.
◎ 사람들은 중간의 선호에 투표한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에서 정책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정치학자인 블랙과 다운즈 등은 다수결 투표제 아래에선 중간의 선호를 가진 중위의 대안이 선택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양당 체제하에서 주민의 선호가 다른 다수의 대안적 정책이 존재할 때 두 정당은 과반수의 득표를 위해 극단적인 사업보다는 주민의 중간 수준 선호사업에 맞춘 정강정책을 제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중위투표자 정리(Median Voter Theorem)'라고 한다.
중위투표자는 선호 분포에서 정확히 한가운데에 있는 유권자를 의미한다.
공공선택이론의 창시자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뷰캐넌은 선거만이 문제가 아니라 투표로 뽑힌 대리인이 주인의 뜻에 반하게 행동하는 주인-대리인 문제도 민주주의의 약점이라고 지적했다.
주인(국민)은 대리인(정치가)이 주인의 이익(선호)을 충실히 반영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주인의 이익(선호)과 대리인의 이익(선호)이 일치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주인은 세금을 아껴 쓰길 원하는 반면 대리인들은 체면이나 과시를 위해 아방궁과 같은 관청을 짓는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
주인이 이 같은 대리인의 행동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건 한계가 있다.
게다가 주인과 대리인 사이에는 정보의 비대칭성이 존재한다.
직접 업무를 수행하는 대리인이 주인이 모르는 감춰진 정보를 보유하고 있다는 뜻이다.
대리인으로선 숨겨진 정보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해 보려는 기회주의적 속성을 갖게 된다.
경제학은 인간의 행동을 연구하는 분야지만 최근엔 심리학의 통찰력과 결합해 행동경제학(behavioral economics)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
경제학 이론에선 합리적 인간을 전제로 인간의 행동을 분석하지만 행동경제학은 인간의 행동이 항상 합리적이진 않다고 지적한다.
사람들의 행동은 시간에 따라 일관적이지 않으며,때론 자신의 이익 극대화보다는 공평성에 근거한 결정을 내린다는 것이다.
현실은 복잡하다. 정보는 불완전하고 정부도 불완전하며 인간 또한 불완전하다.
맨큐의 경제학은 우리를 둘러싼 현실을 설명하고 가능한 한 개선하려면 이 같은 불완전성을 정밀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강현철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hc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