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감탄한 일본의 시민의식

남을 먼저 배려하고 질서 잘지켜

[Cover Story] 절망속에서도 침착했던 일본인
혼란은 더 큰 혼란을 부른다.

지진이나 폭동은 직접 피해보다 그 틈을 타고 발생하는 약탈과 방화의 2차 피해가 훨씬 심각하다고 한다.

천재(天災)가 곧 인재(人災)라는 말도 그래서 생겼다.

하지만 대지진으로 엄청난 인명손실과 재산피해를 입은 일본은 큰 동요와 혼란 없이 차분하게 질서를 유지해 주목을 받고 있다.

일본인에게는 두 개의 원초적 공포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잦은 지진에 대한 숙명과 같은 공포, 다른 하나는 전후 히로시마 피폭이 깊게 새겨놓은 핵에 대한 공포다.

이번 동북부 지방의 대지진과 그로 인한 후쿠시마 원전의 방사능 누출은 일본인의 이러한 원초적 공포를 한꺼번에 현실로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특유의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대지진 발생 당일인 지난 11일 저녁 버스가 끊긴 어두운 거리로 쏟아져 나온 도쿄 시민들.

마치 야간 경기가 끝난 축구경기장에서 쏟아져 나온 관중들로 착각할 정도였으나 뛰거나 소리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한 초등학교 운동장에 S자를 겹쳐 이어놓은 듯한 사람들의 행렬이나 센다이 시민들에게 급수차로 마실 물을 공급하는 항공사진에도 비뚤비뚤 그려놓은 줄을 누구 하나 이탈하지 않았다.

슈퍼마켓 앞에는 생수와 비상식량을 사려는 시민들이 2시간 넘게 줄을 서있다. 대피소로 변한 학교 강당은 담요를 쓰고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거나 잠을 청할 뿐 울거나 분노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절망적 상황에서 혼란도 절규도 없는 일본인의 이러한 '침착한' 모습에 세계는 놀라움을 보냈다.

뉴욕타임스는 "극단적일 정도로 일본인들은 침착했다"고 전했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는 "일본의 시민의식은 인류의 정신이 진화한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극찬했다.

대일감정이 좋지 않은 중국 언론까지도 "일본인에게는 도덕의 피가 흐르고 있다"며 일본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재난 앞에 냉정하리만큼 침착한 일본인,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먼저 일본의 효율적인 재난방재 시스템을 꼽을 수 있다.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지진예측기술을 보유하고 있으며, 지진피해 예방시설이 잘 갖춰져 있는 나라다.

도쿄지역은 1923년 진도 7.8의 간토대지진으로 14만명이 목숨을 잃는 대참사를 겪었다.

(이 중에는 혼란 와중에 학살된 조선인 6000여명이 포함돼 있다. )

일본 정부는 이날을 기념해 매년 9월1일을 '방재의 날'로 정하고 전국적인 지진대피와 방재훈련을 실시한다.

이런 훈련을 통해 지진발생시 대피요령은 전 국민의 상식이 돼있다.

건물의 흔들림이 끝나면 헬멧을 쓰고 건물을 빠져나와 대피소로 지정된 학교나 공공시설로 간다.

매뉴얼에 따른 평소훈련 덕분에 위급한 실제상황이 닥쳐도 큰 혼란 없이 대처할 수 있다.

전후 최악이라는 한신 대지진(1995년) 때 보여준 정부의 신속한 재난대응 태세도 일본인에게 든든한 의지가 된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는 일본인의 심리 DNA도 혼란 속에서 차분함을 잃지 않는 비밀의 하나다.

내 가족과 재산을 잃어도 그저 조용히 눈물을 닦을 뿐이다.

하소연이나 큰소리를 내지 않는 것은 폐가 될 뿐 아니라 나보다 더 큰 피해를 당한 사람이 있을까봐 조심하기 때문이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함부로 남의 은혜를 입지 않는다. 은혜는 당연히 보은이 전제되기 때문에 받는 사람보다 베푸는 사람이 더 신중해야 한다.

일본인 특유의 부끄러움(恥) 문화도 재난속의 조용한 질서가 유지되는 비밀의 하나다.

일본인은 남의 눈을 많이 의식하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어떤 절망적인 상황도 그저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체념한다.

이런 일본인의 침착함에 대해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억눌린 대지진 스트레스가 부정적인 방향으로 분출할 가능성이다.

벌써 일각에서는 대지진을 계기로 그렇지 않아도 장기 불황에 시달려온 일본이 극우보수화의 길로 내달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극우세력이 위기에 중심을 잡지 못하는 국민을 선동해 그들이 원하는 정치체제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일본은 90여년 전 그런 역사적 경험이 있다.

바로 간토 대지진이다.

이 대지진을 계기로 자유민권운동이 꽃핀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가 끝나고 이후 쇼와 군국주의로 치달았던 것이다.

대지진 발생 1주일.

재난의 무게가 쓰나미 피해에서 원전 폭발 가능성 쪽으로 옮겨지면서 일본인의 공포가 극대화되는 양상이다.

세계 언론들은 사재기를 하지 않는 '침착한 일본인'들이 이제 상점의 진열대를 비우기 시작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시민들에게 사재기를 자제해달라고 당부하는 장관들의 회견도 나왔다.

혹시나 있을 방사능 오염을 피해 도시를 탈출하는 행렬도 길어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망속의 침착함, 남을 배려하고 질서를 지키려는 일본인의 자세가 대재난을 이겨내는 힘이 되고 있다.

우종근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rgbac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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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해때마다 신뢰받는 日언론

절제되고 확인된 사실만 보도

"절제된 내용을 국민들에게 전하는 게 언론의 역할이다. 무분별한 소식을 그대로 전할 수 없다. "

일본 공영 NHK방송의 한 아나운서가 "쓰나미가 몰려와 건물을 무너뜨리는 모습을 보고 어떻게 침착하게 방송을 할 수 있느냐"는 한 외신 기자의 질문에 답한 말이다.

일본 언론은 평소에도 그렇지만 충격을 드러내지 않고 사실 전달에 주력한다.

무슨 일이 터지면 목청을 높이고 흥분하고 자극적인 표현을 총동원하는 우리네 방송과 많이 다르다.

이번 대지진 속에서 자극적인 표현과 사망자의 모습이 담긴 영상은 일본 언론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일본 방송을 그대로 받아 중계하는 우리 방송들이 더 흥분하고 표현도 더 자극적이었다.

시시각각 생중계되는 현지 화면에서 쓰나미가 땅 위의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생생한 장면은 있었으나 아비규환의 현장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일본 언론의 모습은 충격과 슬픔에 빠져있는 이재민들을 안심시키고 서로를 믿게 하는 또 다른 치유제로 작용한다.

재난 발생시 언론은 국민들에게 정확한 재난 · 대피 관련 정보를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일본인들은 이런 점에서 언론을 신뢰한다.

일본 언론은 재난 발생시 신속한 경보부터 피난처 정보,대피 요령,생활 정보 등 상세히 전달한다.

피해 상황도 객관적인 취재에 따라 확인된 것만 보도한다.

이번에도 일본 언론의 기자와 아나운서들은 침착하고 차분한 어조로 재난 상황을 전달했다.

장성호 한국경제신문 기자 ja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