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모나 두뇌도 우연의 결과 아닌가.

◆ 질문 5. 로마의 콜로세움과 고문
[Cover Story] 우연적 여건에 의한 부당한 불평등?

“콜로세움에서 사자에게 물어뜯기는 사람들을 보고 로마 사람들이 쾌락을 느끼는 것을 보고 쾌락을 중시하는 공리주의자들은 무엇이라 답할 것인지”를 샌델은 공박하고 있다.

또 테러리스트가 폭탄을 설치한 곳을 자백하도록 만들기 위해 고문을 해도 좋은 것인가 라는 질문도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묻고 있다.

공리주의는 전체의 쾌락을 중시하기 때문에 기독교 신자 등을 사자밥을 만들고 이를 즐기는 행위에 대해서도 비난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는 질문이다.

또 사회 전체의 안전을 위해 반인권적 고문도 정당화할 것이라는 우려를 샌델은 제기하고 있다.

△ 다른 생각

콜로세움의 광기를 비판하기는 쉽다.

또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그런 살육에 반대할 것이다.

그러나 복싱이나 K1같은 잔혹한 경기는 지금도 살아있다.

로마는 노예제 사회였다.

계급 사회의 풍속을 현대에 끌고와 지금의 윤리적 기준으로 찬반을 묻게 되면 답이 없다.

그리스 민주주의도 그렇다.

그리스 민주주의는 자유로운 소수 시민의 특권이었지 노예들의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지금의 기준으로 그리스 민주주의를 엉터리였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사람을 공개처형하는 것은 전근대성의 상징일 뿐이다.

물론 아직도 지구상에는 북한처럼 공개처형 하는 나라가 적지않다.

다수의 즐거움을 위해 소수를 제물로 바치는 그런 광포성을 옹호할 만큼 공리주의가 어리석지도 단순하지도 않다.

공개처형 등은 그 자체로 전체 사회의 폭력성을 높일 뿐이어서 공리주의적 원칙에서도 이는 부인된다.

공리주의의 원조인 18세기의 체사레 베카리아가 그의 유명한 ‘범죄와 형벌’에서 사형제도 반대론을 전개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고문 문제는 더욱 간단하지 않다.

만일 테러리스트가 시한폭탄을 장치한 것이 명확한 객관적 사실이라면 현명한 경찰은 수단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장소를 실토하게 만들 것이다.

이는 국가의 책임이기도 하다.

국가의 행위에 무조건 도덕의 잣대를 들이밀 수는 없다.국가는 전쟁할 권한를 독점하고 있다.

전쟁은 반인간적이니 국가로부터 전쟁할 권한를 박탈해야 하나.

이는 긴급성의 문제를 야기하는 것이지 평소의 고문행위를 정당화하는 논법과는 상관없다.

마치 다른 적절한 방법이 있을 것처럼 암시하면서 고문의 잔혹성에 반대하는 논리를 펴는 것은 무책임하다.

샌델의 글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 표현된다.

극단적 상황의 예를 든 다음 일반적 상황에 이를 적용하면서 그의 글을 읽는 초심자들을 도덕지상주의로 유도하는 교묘한 화법을 쓰고 있다.

이런 수법은 순진한 어린 학생들을 우롱하는 것이다.

샌델은 콜로세움의 예를 설명하면서 사람의 기호는 하나하나 저울 위에 달아야하는 것이지 (공리주의라는) 하나의 잣대로 한꺼번에 저울에 달아서는 안된다는 논리를 편다.

맞는 말인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하나하나 저울에 다는 방법은 결국 시장 밖에 없다.

공동체주의의 극단적 형태인 공산주의 국가야말로 신발이면 신발, 옷이면 옷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모델 밖에 없다.

개인의 기호는 시장에서 다양한 공급이 맞추어 주는 것이지 결코 국가가 공급하는 가치가 아니다.

잔혹성의 문제만 하더라도 노예제도가 폐지된 것은 사람들의 도덕심이 아니라 비자발적 노예 노동보다 자발적인 자유인의 노동이 훨씬 생산성이 높다는 것이 발견된 다음의 일이었다는 점도 기억해 두자.

도덕심이 아니라 사회발전이 그리고 시장경제의 성숙이 인간에게 도덕심을 가능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 질문 6. 장기매매 허용?


인도의 가난한 농부가 자신의 장기를 팔아 아들 학비를 대는 것이 정당한가.

샌델은 당연히 아니라고 말한다. 샌델은 신자유주의 혹은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지극히 비인도적이며 잔혹한 장기매매에도 개인은 자신의 신체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찬성할 것이라는 암시를 주고 있다.

실제로 미국의 일부 자유주의자들은 장기매매 합법화(허용)를 주장하고도 있다.

△ 다른 생각

당연히 인간은 자신을 온전히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자유를 중시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혐오스런 장기매매까지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장기매매에 동정과 함께 분노를 느끼는 것과 현실에서 허다한 문제 상황이 발생하는 것은 다른 차원에서 접근해야 마땅하다.

생명공학 줄기세포 등이 아직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환자에 대해 일정한 조건에서 장기를 이식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장기이식자가 가족이라면 혹은 댓가 없는 기증이라면 우리는 이를 적극 장려한다. 김수환 추기경 같은 분들의 사례는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문제는 돈으로 신체 장기를 주고받는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이라면 인간 존엄성의 일부분이 그것도 돈으로 매매된다는데 이중의 당혹감을 갖게 된다.

그런데 만일 이미 죽어가고 있는 시신이라면 어떨까.

또 죽어가는 사람을 앞에 두고 있는 매우 가난한 가족이라면 어떨까.

돈을 주고 장기를 매매하지는 않았지만 사후적으로 적당한 보상을 한다면, 그리고 사후적 보상이 관행화된다면, 혹은 암시된다면 우리는 여기에도 반대해야 할까.

우리가 당사자라면 어떨까.

역시 판단은 쉽지 않다. 현실에서는 이렇게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많다.

이런 구조적으로 어려운 문제를 자기와 다른 사상을 공격하는데 동원하는 것은 매우 고약한 화법이다.

정작 샌델 자신은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답을 내놓지 않고 있다.

◆질문 7. 다양성 입학전형


다양성 입학전형은 우리나라에도 말그대로 다양하게 도입되어 있다.

샌델은 다양성 입학전형에 대해서는 다른 주제와 달리 강한 어조로 직접 이를 옹호하고 있다.

다양성은 좋은 가치이고 대학은 다양성을 지향해야 하기 때문에 다양성 전형도 좋다는 것이다.

다양성 전형은 시험 성적 외에 다양한 인종을 입학시키거나 빈부차를 해소하기 위해 성적 아닌 다른 기준을 적용해 입학생을 뽑는 것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지역균형 선발이라는 다양성 제도를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자, 학생 여러분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다른 생각

미국에서 다양성 전형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은 1960년대 이후부터이다.

주로 흑인 등 유색인종에게 가산점을 주어 대학에 입학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작용되고 있다.

그러나 만일 어떤 흑인 학생이 온전히 자신의 실력으로 입학하였는데 다른 친구들이 “아, 이 친구는 특례로 입학하였구나” 라고 낙인을 찍으면 이 학생의 반응은 어떨까.

문제는 대학은 고등학문을 하는 곳이라는 사실이다.

실력 아닌 다른 기준으로 뽑는다면 이는 학문의 전당이기를 포기하는 것이 아닐까.

학업에 의한 사회적 차별이나 학력에 의한 차별대우,혹은 흑인 차별 등은 대학이 아닌 사회에서 풀어야하는 문제가 아닐까.

만일 특례 입학을 허용한다면 과연 몇명이나 뽑아야 할까.

실제로 흑인 사회도 이미 충분히 발달하여 엄청난 부자도 많은데 이런 가정의 학생들조차 과거 한때 조상들이 차별받았다는 것을 이유로 지금 특혜를 주어야 할까.

지역의 교육기회 불평등을 해소한다는 명분으로 특례를 주면 서울의 가난한 학생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오히려 역차별이 아닐까.

샌델은 이 문제에 대해 그것은 대학이 결정할 문제이고 대학들이 다양성 제도를 두고있으므로 정당하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전형적인 동어반복에 해당한다.

또 지금 존재하는 것은 옳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틀리다고 말하는 것에 다름 아니게 된다.

당위의 문제를 논의하는 센델로서는 궁색한 논변이다.

<롤스 정의론의 문제>

샌델에 앞서 정의론을 설파한 사람은 샌델의 스승이기도 한 ‘존 롤스’라는 하버드대 철학 교수이다.

그의 책이 바로 유명한 ‘정의론’이다.

이 책에서 롤스는 정의를 ‘공정한 어떤 것’(justice as fairness)로 정의하고 정의의 원칙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정의의 원칙은 2단계로 구성되는데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제1의 원칙이라고 한다면 최소 수혜자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제2의 원칙이다.

또 이런 기본 원칙이 적용된 결과 ‘우연적 여건에 의한 부당한 불평등은 시정되어야 한다’는 행동 원칙이 도출된다.

부모가 부자이기 때문에 자식도 잘 살게되는 것 등이 우연적 여건에 의한 불평등이고 이를 시정하기 위해 높은 상속세를 매겨야 한다는 등의 주장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지역균형 선발도 이런 원칙이 적용된 결과다.

교육혜택이 많은 서울 아닌 지방에서 공부한 것도 우연적 여건에 의한 부당한 불평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만일 우연적 여건이 두뇌라면 어떨까. 두뇌야말로 우연적 여건에 의한 부당한 불평등을 구성한다.

A학생은 10시간을 공부하고 60점을 받는데 B는 두시간만 공부하고도 100점을 받는다면 B의 점수에서 20점을 떼내 A에게 주어야(시정해야) 할까.

만일 신체나 미모라면 어떨까. 당연히 이 것이야말로 우연적 여건에 의한 부당한 불평등이다.

그런데 어떻게 시정하나?

이런 논리대로라면 인간의 모든 노력이나 성실성 같은 덕목들의 가치도 모두 부인된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성격도 온화한 인품도 대부분은 타고난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결과 역시 시정되어야 할까. 게으른 것도 타고난 것(우연적 여건)이다.

이때 부지런한 사람과 도일한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무언가를 시정해야 할까.

우리는 이런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실제로 롤스는 정의론 17절에서 두뇌와 성품도 타고난 것, 다시 말해 우연적 여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자, 정의란 과연 무엇이며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 생글 독자 여러분들이 지금부터 연구해보시기 바란다.

정규재 경제교육연구소장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