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리주의와 관련해서 최근 베스트셀러로 인기를 끌고 있는 마이클샌델미국하버드대 교수의‘정의란 무엇인가’에 등장하는 사례를 살펴보자.
“당신은전차기관사이고,시속100㎞로철로를질주한다고가정해보자.
저앞철로에 인부 다섯 명이 작업 도구를 들고 서 있다.
전차를 멈추려 했지만 불가능하다.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는다.
이 속도로 다섯 명의인부를 들이받으면 모두죽고 만다는 사실을 알기에(이 생각이 옳다고 가정하자) 필사적인 심정이 된다.
이때 오른쪽에 있는 비상철로가 눈에 들어온다.
그곳에도 인부가 있지만,한 명이다.
전차를 비상 철로로 돌리면 인부 한 사람이 죽는 대신 다섯사람이 살 수 있다."
이 경우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죄 없는 사람 하나가 죽더라도 다섯이 죽는 것보다는 낫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런 판단은 큰 무리없이 받아들여 질 수 있다.
한 사람을 희생해 다섯 목숨을 구하는 행위는 정당해 보인다는 직관이 쉽게 설득력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보다 쉽지 않은 결정이 될 것은 분명하다.
한 가지 사례를 더 생각해보자.
칠레 광부 이야기로 돌아와 33명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다른 조건으로 가정해보자.
"안타깝게도 33명의 광부들이 둘로 나뉘어 매몰되었는데 한쪽 갱도에 32명,바로 옆에 있는 또 다른 갱도에는 단 한 명이 갇혀 있다.
아무런 대응을 취하지 않으면 산소 부족 등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죽을 것이 확실하다.
이때 광부들을 구해내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 폭탄을 사용해 갱도를 뚫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어느 쪽 광부를 구하려 하든 상관없이 다른 쪽 광부들은 폭탄에 의해 갱도가 무너지고 결국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한 명을 희생하고 32명을 살려야 하는가.
즉 소수의 목숨을 희생하고 다수를 살리는 게 합당한가.
그러나 도덕의 가장 근본적인 원칙인 인간 존중의 원칙은 소수를 희생하고 다수를 살려야 한다는 직관과 쉽게 양립할 수 없다.
한 명의 광부를 구하기로 결정하는 것은 다른 32명의 목숨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며,그 반대도 성립한다.
둘 중 어떤 선택도 옳다고 말하기엔 정당성이 부족해 보인다.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사다리 게임이라도 해야 하나.
사다리 게임은 조작 가능성이 있으니 동전을 던질 것인가.
어느 한쪽 광부를 희생하든 어느 쪽이 절대적으로 더 옳다는 판단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
마음 편하게 운명에 맡기며 동전을 만지작거려야 할지 모른다.
이처럼 어려운 선택을 둘러싼 고민이 최근 우리 사회에서도 이슈가 되고 있다.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인문사회계열 분야에서 부동의 베스트셀러로 떠올랐고,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TV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동이' 등도 모두 정의 문제와 관련된 소재를 다루고 있다.
현 정부도 초창기 효율성 위주의 정책에서 선회해 '공정한 사회'를 모토로 내세워 국정을 운영하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정의'라는 화두를 놓고 이리저리 궁리하고 있는 상황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어느 사회에서든 핵심적인 질문이 될 것이다.
특히나 어느 정도 경제적 성장을 달성한 사회에선 필연적으로 제기되는 질문이다.
정의의 문제는 결국 '각자에게 응분의 몫을 어떻게 나눠줄 것인가'와 관련된다.
단순한 문제로 보이지만'응분의'라는 조건은 참 복잡하고 까다롭다. 현실에서는 실현할 수 없는,단순한 이상주의자들의 논의로 치부될 수도 있다.
이론과 실천,이상과 현실은 늘 괴리가 있어서 아무리 좁히려 해도 벌어진 간격이 남는다.
그렇다고 가만 두고 고민조차 않는다면 삶은 더 힘들어질 것이다.
결과를 중시하는 공리주의가 됐든,동기를 중시하는 칸트의 의무론이든,롤즈의 점진적 자유주의가 됐든,공동체주의와 미덕이 결합된 것이든,어쨌든 과연 정의란 무엇인가.
정답은 없다.
여러분이 정답을 만들어 보기 바란다.
박성진 S · 논술 선임연구원 moke@hanmail.net
“당신은전차기관사이고,시속100㎞로철로를질주한다고가정해보자.
저앞철로에 인부 다섯 명이 작업 도구를 들고 서 있다.
전차를 멈추려 했지만 불가능하다.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는다.
이 속도로 다섯 명의인부를 들이받으면 모두죽고 만다는 사실을 알기에(이 생각이 옳다고 가정하자) 필사적인 심정이 된다.
이때 오른쪽에 있는 비상철로가 눈에 들어온다.
그곳에도 인부가 있지만,한 명이다.
전차를 비상 철로로 돌리면 인부 한 사람이 죽는 대신 다섯사람이 살 수 있다."
이 경우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죄 없는 사람 하나가 죽더라도 다섯이 죽는 것보다는 낫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런 판단은 큰 무리없이 받아들여 질 수 있다.
한 사람을 희생해 다섯 목숨을 구하는 행위는 정당해 보인다는 직관이 쉽게 설득력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보다 쉽지 않은 결정이 될 것은 분명하다.
한 가지 사례를 더 생각해보자.
칠레 광부 이야기로 돌아와 33명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다른 조건으로 가정해보자.
"안타깝게도 33명의 광부들이 둘로 나뉘어 매몰되었는데 한쪽 갱도에 32명,바로 옆에 있는 또 다른 갱도에는 단 한 명이 갇혀 있다.
아무런 대응을 취하지 않으면 산소 부족 등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죽을 것이 확실하다.
이때 광부들을 구해내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 폭탄을 사용해 갱도를 뚫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어느 쪽 광부를 구하려 하든 상관없이 다른 쪽 광부들은 폭탄에 의해 갱도가 무너지고 결국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한 명을 희생하고 32명을 살려야 하는가.
즉 소수의 목숨을 희생하고 다수를 살리는 게 합당한가.
그러나 도덕의 가장 근본적인 원칙인 인간 존중의 원칙은 소수를 희생하고 다수를 살려야 한다는 직관과 쉽게 양립할 수 없다.
한 명의 광부를 구하기로 결정하는 것은 다른 32명의 목숨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며,그 반대도 성립한다.
둘 중 어떤 선택도 옳다고 말하기엔 정당성이 부족해 보인다.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사다리 게임이라도 해야 하나.
사다리 게임은 조작 가능성이 있으니 동전을 던질 것인가.
어느 한쪽 광부를 희생하든 어느 쪽이 절대적으로 더 옳다는 판단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
마음 편하게 운명에 맡기며 동전을 만지작거려야 할지 모른다.
이처럼 어려운 선택을 둘러싼 고민이 최근 우리 사회에서도 이슈가 되고 있다.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인문사회계열 분야에서 부동의 베스트셀러로 떠올랐고,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TV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동이' 등도 모두 정의 문제와 관련된 소재를 다루고 있다.
현 정부도 초창기 효율성 위주의 정책에서 선회해 '공정한 사회'를 모토로 내세워 국정을 운영하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정의'라는 화두를 놓고 이리저리 궁리하고 있는 상황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어느 사회에서든 핵심적인 질문이 될 것이다.
특히나 어느 정도 경제적 성장을 달성한 사회에선 필연적으로 제기되는 질문이다.
정의의 문제는 결국 '각자에게 응분의 몫을 어떻게 나눠줄 것인가'와 관련된다.
단순한 문제로 보이지만'응분의'라는 조건은 참 복잡하고 까다롭다. 현실에서는 실현할 수 없는,단순한 이상주의자들의 논의로 치부될 수도 있다.
이론과 실천,이상과 현실은 늘 괴리가 있어서 아무리 좁히려 해도 벌어진 간격이 남는다.
그렇다고 가만 두고 고민조차 않는다면 삶은 더 힘들어질 것이다.
결과를 중시하는 공리주의가 됐든,동기를 중시하는 칸트의 의무론이든,롤즈의 점진적 자유주의가 됐든,공동체주의와 미덕이 결합된 것이든,어쨌든 과연 정의란 무엇인가.
정답은 없다.
여러분이 정답을 만들어 보기 바란다.
박성진 S · 논술 선임연구원 mok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