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다양성=정의’?··· “공동善 벗어난 다양성은 오히려 毒”
미국1970년대 소수자 우대정책 재검토하기도



"100야드 달리기 경주에서 두 사람 중 한 사람의 다리가 묶여 있는 상황을 상상해 보라.

그가 10야드를 가는 동안 묶이지 않은 사람은 50야드를 갈 것이다.

이들은 어떻게 이런 불공정한 상황을 시정할 수 있을까.

단지 묶여 있는 것을 풀고 경주가 계속되게 하는 것이 적절한가.

이것이 요새 한참 얘기되는 동등한 기회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여전히 40야드나 앞서 있다.

다리가 묶인 사람에게 40야드의 차이를 만회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보다 나은 정의가 아닌가.

또는 경주를 다시 시작하거나…."

미국 제36대 대통령 린든 존슨이 1966년 행한 연설의 일부다.

존슨 대통령은 민주당 대통령후보 지명전에서 케네디에게 패하고 부통령이 되었다가 케네디가 암살당한 후 대통령에 취임해 진보적 정책을 추진한 인물이다.

특히 미국의 인종적 민족적 성적 차별과 불평등에 대한 해결책으로 소수자 우대정책(Affirmative Action)을 제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어퍼머티브 액션은 소수세력 우대정책,소수자 배려정책,차별시정조치 등 다양한 말로 번역돼 왔다.

이 정책은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데 뿌리를 두고 있다.

과거 불이익을 받아왔던 흑인과 소수인종,여성들을 교육과 고용 등에서 우대함으로써 다양한 미국인,모든 미국인이 '아메리칸 드림'에 참여할 수 있게 보장하자는 것이다.

이처럼 다양성 존중은 정의를 구현하는 수단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전 세계 인종의 집합장인 이민의 나라 미국에서 '다양성=정의'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다.

과연 다양성이 정의일까.



⊙ 기회의 평등이 아닌 결과의 평등을 추구

소수세력 우대정책은 1964년 존슨 대통령이 제안한 민권법에 의해 시작됐다.

존슨 대통령은 "우리는 권리와 이론으로서 평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결과로서의 평등을 추구한다"고 천명했다.

이는 과거에 이뤄졌던 불공정을 제거하려면 모든 사람이 동등한 경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넘어 동등한 결과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백인은 노예제와 인종분리로 인해 생긴 불공평한 결과에 대해 흑인에게 보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존슨 대통령의 방침에 따라 당시 미국에서는 인종별 평가방식(race norming)이란 정책이 널리 활용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백인 흑인 히스패닉 아시아인 등 네 명의 남성이 입사시험에서 모두 300점씩을 받았다고 치자.

점수는 동일하지만,인종별 응시생 가운데 각 사람의 성적이 차지하는 위치는 다르다.

흑인은 상위 87%,히스패닉은 74%,백인과 아시아인은 47%로 나타나 결국 흑인이 입사에 성공하는 것이다.

민권법 이후 수십년간 소수세력 우대정책은 미국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각 주정부와 지역사회가 자체적으로 차별시정 규정을 만들고, 기업들도 대대적이며 자발적으로 차별시정 프로그램을 추진했다.

기성의 여러 특권계층을 의미하는 '이스태블리시먼트'(Establishment · 미국 동부의 힘 있는 정치인 기업인 관료 언론인 등이 대표적임)에서도 소수세력 차별시정정책을 지지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들은 이 정책의 시행으로 역차별을 받을 희생자들이 많지 않을 것이고,그렇게 심한 타격을 받지 않을 것으로 추정했다.

⊙ 차별시정정책에 대한 반성도 잇따라

소수자 우대 정책은 1978년 첫 번째 변곡점을 맞는다.

'배키 재판'이 바로 그것이다.

앨런 배키라는 백인 남성이 2년간 연속해서 캘리포니아 대학의 의과대학원에 입학이 거부되자,자신보다 자격이 모자란 소수인종 출신의 지원자들을 합격시킨 것은 부당하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이 대학은 입학 정원 100명 가운데 소수인종 출신을 16명 합격시켰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소수인종 출신자에 대한 '입학 쿼터'를 정한 것은 연방법 위반이지만,인종은 입학 여부를 결정하는 기준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인종을 학생 선발 기준으로 삼을 수 있지만 소수자 입학 정원을 쿼터로 별도 배정하는 것은 안 된다는 내용으로 소수자 우대정책에 대한 첫 제동이었던 것이다.

연방대법원의 이 같은 판결 이후 많은 대학과 기업이 소수자 우대프로그램을 수정했다.

두 번째 변곡점은 1996년 캘리포니아 주민들이 제기한 '캘리포니아 민권관계 주민발의안(CCRI)'이다.

발의안은 인종 성 피부색 민족 등을 차별의 기준뿐 아니라 선택적 우대의 기준으로도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발의안의 지지자들은 소수에 대한 특혜 또는 우대조치를 반대하면서 인종과 성 등에 관계없는 동등한 기회가 모든 사람들에게 보장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수자 우대 정책은 결국 사람들이 자신들의 실패를 남의 탓으로 돌리게 해 스스로 노력하지 않게 만드는 문제가 있다는 점도 부각됐다.

이와 관련,이 정책이 흑인들에게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됐다.

이 정책으로 흑인들은 '희생자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되면서 열등의식을 내면화하게 된다는 것이다.

⊙ 다양성의 존중은 공동선을 이루기 위한 것

미국의 소수세력 우대 정책은 '결과의 평등 추구'와 그것의 부작용에 대한 반성이 부딪히며 논란을 빚어왔다.

다양성을 추구하고 존중하는 이유는 그것이 공동선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공동선을 지향하기보다는 특혜를 부여함으로써 사회 구성원들이 스스로 노력하고 책임지는 자세를 갖지 않게 하는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소수자 우대 정책을 남용할 경우 아예 공동선을 망각하기도 한다. 미국에서도 그러한 역사가 있다.

1940년대 미국 다트머스대는 유대인 학생의 입학을 제한하면서 "다트머스는 학생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기 위해 설립된 대학"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대학의 학생 선발이 정당하려면 대학의 존립 목적(사명)에 부합해야 하는데 다트머스대는 그러한 목적을 외면한 것이다. 미국은 이러한 논란의 역사를 거쳐 소수자 우대정책이 뿌리를 내렸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다양성을 명분으로 내세운 수많은 특별전형이 생겨나고 있다.

국가고시도 일반 경쟁 시험을 폐지하고 전문가 특채를 확대하는 움직임을 보이다가 반대 여론에 밀려 주춤하는 상황이다.

모든 사람들이 목표로 삼을 수 있는 보편적인 기준이 존중받지 못한다면 정의로운 사회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장경영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longr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