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재정 지출 늘려 경기 부양하라는 말 잘못했나!…고개 떨군 '케인지언'

남유럽 재정위기로 케인즈 경제이론에 강한 의구심

1936년 영국 런던의 서점가에 등장한 5실링(shilling · 영국의 옛 화폐단위로 20실링이 1파운드)짜리 책 한 권이 세상을 바꿨다.

그 책은 20세기 최고의 경제학자로 꼽히는 존 메이나드 케인스가 쓴 '고용,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이다.

케인스의 경제이론은 1970년대 초까지 거시경제학의 주류를 차지하며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또 다른 경제학자들에 의해 다양하게 해석되고 발전되면서 여러 케인스 학파가 탄생했는데,그들을 케인시언(Keynesian)이라 부른다.

케인스 경제학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신고전파 케인시언(neo-classical Keynesian),후케인시언(post Keynesian),신케인시언(neo Keynesian) 등으로 나뉜다.

2008년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로 인한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자,정부 재정지출을 통한 경기부양을 주장하는 케인시언의 목소리가 커졌다.

경기침체에 따른 수요 부진을 메워줄 현실적인 대책이 정부의 재정지출 확대 외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 남유럽 재정위기로 수세에 몰리는 케인시언

하지만 그리스 등 남유럽 국가들의 정부 재정의 취약성이 부각되면서 금융위기 이후 득세했던 케인시언 경제 이론이 수세에 몰리고 있다.

남유럽 국가들은 경기부양을 위해 막대한 자금을 풀었지만 성장 둔화로 세수가 감소하면서 정부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 결과 남유럽 국가들이 재정위기를 맞자 "경기 침체기에는 정부가 재정지출을 늘려야 한다"는 케인스 경제 이론에 대한 의구심이 커지고 있다.

이달 초 서울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 회의에서도 경제가 본격적으로 회복될 때까지 기다린 뒤 경기부양책을 거둬 들여야 한다는 것에 이견을 제기하는 입장이 나왔다.

경제가 살아날 때까지는 확대 재정정책을 펴야 한다고 입을 모았던 두 달 전 회의 때와는 뚜렷한 기류변화다.

그만큼 확대 재정정책을 주장하는 케인시언의 입지가 좁아진 것이다.

남유럽 국가뿐 아니라 미국도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정부 빚에 비상이 걸렸다.

미국 정부 부채는 13조달러로 국내총생산(GDP)의 90%에 달한다. 경기 활성화를 위해 7870억달러의 재정을 쏟아부었는데도 실업률은 여전히 10%에 가깝다.

정부의 재정확대로 더 많은 일자리가 생기고 결국 경기가 살아나 세수확대로 이어진다는 케인스 경제이론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케인스가 어디로 잘못 가고 있는가(Where Keynes Went Wrong)'의 저자인 헌터 루이스씨는 경제전문지 포천에 "정부 지출을 늘리는 것만으로 더 이상 문제를 풀 수 없다"고 말했다.

결국 실업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자칫 정부 빚만 불어나 인플레이션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제프리 삭스 컬럼비아대 교수는 '포스트 케인시언 시대를 준비할 때'라는 파이낸셜타임스(FT) 기고에서 "단기적으로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기적 같은 정부 정책은 없다"며 "경기부양보다는 투자를 유인하는 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 케인스 경제이론,신고전파 경제학의 청출어람

이제 케인스는 어떤 사람인지,그의 경제 이론의 핵심 내용은 무엇인지 살펴보자.

케인스는 1883년 6월 영국 케임브리지의 하비가에서 당시 케임브리지대의 유명한 경제학자였던 아버지 존 네이블 케인스와 후일 케임브리지 시장이 된 어머니 플로렌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연스럽게 케임브리지의 지성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명문학교 이튼을 거쳐 케임브리지대에 들어가 신고전파 경제학의 거장이었던 알프레드 마셜 밑에서 경제학을 배웠다.

뒷날 케인스가 신고전파 경제학에 대한 비판을 통해 자신의 이론을 완성한 것은 그야말로 청출어람(靑出於藍)으로 꼽힌다.

신고전파 경제학은 노동시장에서 임금이 오르고 내리는 데 따라 노동에 대한 수요와 공급이 변화해 항상 완전고용상태를 달성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실업이 생긴다면,그것은 자발적 실업이라는 게 신고전파 경제학의 주장이다.

이에 대해 케인스는 실업은 유효수요의 부족때문에 생긴다고 역설했다.

유효수요란 기업가가 재화나 서비스를 팔아 얻는 매출액이다. 기업가는 매출액,즉 유효수요를 예상해 그에 맞는 생산활동에 필요한 노동을 고용한다.

노동 공급에 비해 유효수요가 부족하면 비자발적 실업이 발생한다.

그래서 케인스는 고용을 늘리려면 유효수요 진작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는 정부가 재정지출을 늘려 유효수요를 진작할 수 있다는 논리로 연결된다. 케인스가 이른바 '큰 정부'의 이론적 배경을 제공한 것이다.

⊙ 신자유주의 등장으로 케인스 경제이론의 복지국가 축소

이처럼 재정지출을 통한 정부 역할을 강조한 케인스의 경제이론은 복지국가와 결합한다.

정부가 재정정책을 통해 시장에 적극 개입함으로써 복지수준을 높여 서구 국가들은 1945년부터 약 30년 동안 '복지국가의 황금기'를 누린다.

하지만 1970년대 들어 오일쇼크로 세계경제가 위기를 맞자 복지국가의 경제적 기초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때 등장한 것이 신자유주의(neo liberalism)다.

신자유주의는 작은 정부,복지국가 축소,세율인하,공기업 민영화 등을 주장하면서 케인스 경제이론에 기반한 복지국가의 사회정책과 경제정책을 폐기시켰다.

시장이 가장 효율적인 제도이므로 시장에 대한 국가 개입을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1980년대 이후 지배적 이념으로 자리잡았지만,이번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발한 요인으로 지적받기도 한다.

독일의 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이번 위기와 관련해 "생활세계를 무절제하게 시장의 명령에 종속시키는 신자유주의가 심판대에 오른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신자유주의 진영에선 "서브프라임 모기지 시장에 정부가 무리하게 개입하고,경기부양을 위해 많은 돈을 풀면서 금융위기가 터졌다"고 맞선다.

시장이 복잡해지고 예측하기 어려워질수록 한 가지 경제이론만으로 해법을 찾기 힘들다는 점에서 정부의 시장 개입 정도를 놓고 학계에서의 논란은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장경영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longr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