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출된 대표가 국민의 뜻 어길수도 있어… 주인-대리인 문제
[Cover Story] 투표의 숙명… 어떤 투표도 국민 의사 정확히 표현 못해
20세기 최후의 승자는 누구일까.

정치학자인 파리드 자카리아는 서슴지 않고 민주주의를 지목한다.

1900년에는 민주주의라고 부를 만한 국가가 극소수에 불과했지만 오늘날에는 전 세계 국가의 60%가 넘는 199개에 이른다.

민주주의는 국민이 스스로 자신의 정부를 선택한다는 정치적 의미뿐만 아니라 경제 문화 기술 등 삶의 방식으로 굳건히 자리잡았다는 게 자카리아의 주장이다.

민주주의는 인간의 기본권을 고양시키고 창의성을 높이는 역할을 해왔지만 제도적 결함도 내포하고 있다.

민주주의를 보다 발전시키고 굳건히 하기 위해선 어떤 게 필요할까.

⊙ 민주주의의 역사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폴리스에서 유래된 민주주의(Democracy)는 그리스어 데모스(Demos,시민)와 크라티아(Kratia, 권력 또는 지배)의 합성어인 데모크라티아(Democratia, 시민에 의한 지배)가 그 어원이다.

왕이나 귀족이 아닌 시민이 주권자가 돼 스스로를 통치한다는 뜻이다.

아테네에서 시작된 직접 민주주의는 민주정치의 이상향이었다.

10만명에 달하는 아테네 인구 중 3만명의 시민들은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하게 아크로폴리스 광장에 모여 나라 일을 의논하고 결정했다.

비록 소수의 자유 시민만이 정치에 참가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민주주의와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지만 당시로선 혁명적인 일이었다.

봉건제와 절대왕정 시기를 거치고 근대적 시민혁명이 일어나며 민주주의는 다시 대의제 민주주의를 꽃피우기 시작했다.

자본주의 시대를 맞아 사회 주도세력으로 떠오른 시민들은 자유와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민주주의를 정치이념으로 내세웠으며, 혁명을 통해 선거에 의해 뽑힌 대표들에게 정치를 위임하는 대의 민주주의를 현대의 보편적 정치체제로 만들었다.

철학자인 칼 포퍼는 "민주주의는 피를 흘리지 않고 선거를 통해 정부를 갈아치울 수 있는 체제"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 투표의 역설

하지만 민주주의는 출발부터 몇 가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먼저 꼽을 수 있는 게 우민(愚民) 정치의 가능성이다.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국가의 운영은 매우 전문적인 일로 철인(哲人 · 진리를 아는 소수의 엘리트)에게 맡겨야 한다며 시민들이 광장에 모여 국사를 결정하는 것은 자칫 대중 정서에 휩쓸려 잘못된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직접 민주주의를 혐오했다.

중앙집권적이고 엘리트 위주의 정치 행위를 지양하고,지역에서 평범한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을 변화시키려는 풀뿌리 민주주의도 자칫 포퓰리즘으로 전락할 위험을 갖고 있다.

다수결 의사결정이라는 민주주의의 원칙도 논란이 적지 않다.

예를 들어 한 투표에서 유권자들이 A,B,C 등 3가지 정책을 선택할 수 있다고 하자.

그리고 유권자 Ⅰ그룹(유권자 구성비 35%)은 제 1선택으로 A를, 2선택과 3선택으로 각각 B, C를 선호한다.

유권자 Ⅱ그룹(구성비 45%)은 각각 B, C, A 순으로, 유권자 Ⅲ그룹(20%)은 C, A, B 순으로 선호한다.

이때 A와 B 정책을 놓고 투표하면 A가 55%(Ⅰ그룹 35%+Ⅲ그룹 20%), B는 45%(Ⅱ그룹)로 A가 승리한다.

같은 방식으로 B와 C를 놓고 투표하면 B가 80%(Ⅰ그룹 35%+Ⅱ그룹 45%), C가 20%(Ⅲ그룹 20%)로 B가 선호된다.

문제는 A와 C를 놓고 투표하게 될 경우다.

A는 35%(Ⅰ그룹)에 그치는 반면 C는 65%(Ⅱ그룹 45%와 Ⅲ그룹 20%)로 C가 승리한다.

이는 곧 A가 B를, B는 C를, C는 다시 A를 이기게 되는 모순에 빠진다.

A를 B보다 좋아하고 B를 C보다 좋아하면 A를 C보다 좋아하는 선호관계(이행성 · transitivity)를 가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이다.

프랑스의 정치이론가 '콩도르세의 역설'(Condorcet's paradox) 또는 '투표의 역설'(voting paradox)은 바로 다수결을 통해 이행성이 있는 사회적 의사결정 과정에 도달하지 못하는 현상을 뜻한다.

이행성이란 A를 B보다 좋아하고 B를 C보다 좋아하면 반드시 A가 C보다 선호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랬다저랬다 하면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국가 대사를 결정하는 투표를 할 때마다 국민들이 갈짓자로 응답한다면 합리적 의사결정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뜻이다.

⊙ 불가능성 정리

'사회적 선택과 개인적 평가'라는 저서로 1972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케네스 애로는 아예 민주주의가 전제로 하는 합리적 의사결정이 불가능하다는 걸 수학적으로 증명했다.

그는 이상적인 투표제도에 의해 결정된 선택은 △만장일치의 원칙(모든 사람이 A를 B보다 좋아하면 선거에서 A가 B를 이겨야 한다) △이행성의 원칙(A가 B를 이기고 B가 C를 이기면 A가 C를 이겨야 한다) △무관한 대안으로부터 독립의 원칙(A와 B 사이의 우선순위는 무관한 제3의 대안 C의 존재에 의해 영향을 받아서는 안된다) △독재자 부재의 원칙(다른 사람의 선호와 무관하게 항상 자기의 뜻대로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 등의 속성을 가져야 하는데 어떤 투표제도도 이 같은 속성들을 모두 만족시킬 수 없다는 걸 입증한 것이다.

일정한 조건 아래서 개인들의 선호를 통합해 하나의 유효한 사회적 선호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게 바로 '애로의 불가능성 정리'(Arrow's Impossibility Theorem)이다.

민주주의적 방식에 조종을 울린 셈이다.

⊙ 중위투표자의 정리

그렇다면 민주주의에서 정책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정치학자인 블랙과 다운즈 등은 다수결 투표제 아래에선 중간의 선호를 가진 중위의 대안이 선택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양대 정당 체제하에서 주민의 선호가 다른 다수의 대안적 정책이 존재할 때 두 정당은 과반수의 득표를 위해 극단적인 사업보다는 주민의 중간수준의 선호사업에 맞춘 정강정책을 제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중위투표자 정리'(Median Voter Theorem)라고 한다.

중위투표자는 선호 분포에서 정확히 한 가운데에 있는 유권자를 의미한다.

공공선택이론의 창시자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뷰캐넌은 선거만이 문제가 아니라 투표로 뽑힌 대리인이 주인의 뜻에 반하게 행동하는 주인-대리인 문제도 민주주의의 약점이라고 지적했다.

주인(국민)은 대리인(정치가)이 주인의 목적(선호)을 충실히 반영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주인의 선호와 대리인의 선호가 일치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주인은 세금을 아껴 쓰길 원하는 반면 대리인들은 체면이나 과시를 위해 아방궁과 같은 관청을 짓는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

주인이 이 같은 대리인의 행동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건 한계가 있다.

게다가 주인과 대리인 사이에는 정보의 비대칭성이 존재한다.

직접 업무를 수행하는 대리인이 주인이 모르는 감추어진 정보를 보유하고 있다는 뜻이다.

대리인으로선 이 같은 정보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해보려는 기회주의적 속성으로 갖게 된다.

강현철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hck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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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과 냉소에 앞서 민주주의 지키는데 힘 모아야"

오바마의 충고

경제학자인 한스헤르만 호페는 저서 '민주주의는 실패한 신인가'에서 민주주의가 가장 번영한 민국에서조차 한 세기도 채 되지 않고 도덕적 타락과 가족의 붕괴, 사회적 분쟁과 민족·인종·도덕적 긴장감 등을 고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과연 민주주의엔 희망이 없는 것인가.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지난 5월 미시간대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으면서 민주주의의 미래에 대해 뜻깊은 연설을 했다.

그는 혁명과 시민전쟁(남북전쟁), 공황, 세계대전을 거치면서도 민주주의는 천천히, 때로는 고통스럽게, 좀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해 발전해왔으며 끝내 살아남았다며 학생들에게 어떻게 하면 민주주의를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인가를 물었다.

이에 대한 오바마 자신의 대답은 △국민의 적극적 참여 △사실관계에 입각하고 기본적인 시민의식이 유지되는 토론 △열심히 노력하는 모든 국민에게 동등한 기회가 주어지도록 하는 정부의 존재였다.

오바마 대통령은 "국민이 지도자들이 내리는 결정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 때가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때"라며 모든 논쟁과 의문, 냉소에 앞서 민주주의를 지켜나가는 데 힘을 모을 때라고 강조했다.

비록 선거가 민주주의를 보증하는 것은 아니지만 선거 이외에 더 나은 대안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참여와 참여자들의 높은 지적, 도덕적 판단이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