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신화 일군 '위기 경영'의 대가

이건희 회장 '오너 경영' 세계가 주목
[Cover Story] "변해야 산다"… "미래를 준비하라"… "잘나갈때 위기 의식 가져라"…
"모든 제품을 새로 만들어라. VTR 부품 수가 너무 많다. 브라운관의 독창성이 부족하다. 리모컨 조작이 불편하다."

이건희 삼성 회장은 1993년 소니 마쓰시타 필립스 지멘스 등 세계 일류기업들의 제품과 삼성 제품을 같이 진열하는 비교 전시회를 열고 이렇게 삼성의 사장들을 호통쳤다.

이 회장은 책상 위에 놓인 삼성 제품들을 하나하나 망치로 내려치면서 질타했다.

'국내 최고'라는 자부심에 안주해 있던 삼성맨들은 이 회장의 불호령에 깜짝 놀랐다.

이어 이 회장은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고 주문하며 '신경영'을 선언했다.

그는 임직원들에게 "변해야 산다"는 절박감을 불어넣기 위해 출 · 퇴근 시간을 한꺼번에 2시간이나 앞당겨 조정한 '7 · 4제(오전 7시 출근 · 오후 4시 퇴근)'를 도입했다.

신경영은 국내 시장에서의 승리에 취해 자칫 위기에 빠질 수 있었던 삼성을 한 단계 도약시켰다.

⊙ 이건희, 승부사이자 위기경영의 대가

이 회장은 최고경영자(CEO)가 지녀야 할 핵심 덕목으로 꼽히는 '과감하고 빠른 의사결정'에서 탁월한 성과를 보여줬다. 그래서 국제 경영계에서 그는 '승부사'로 불린다.

삼성의 반도체 신화가 대표적인 사례다.

반도체 사업 초기였던 1988년 이 회장은 셀(cell)을 기판 위로 쌓는 스택(stack)방식으로 반도체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도시바 NEC 등 당시 선발업체 대부분이 기판에 홈을 파는 트렌치(trench)방식을 도입한 것과는 정반대였다.

스택이냐, 트렌치냐는 반도체 사업의 운명을 가를 결정적인 선택이었다.

이 중요한 결정에서 이 회장은 선발주자를 따라가는 안전한 선택이 아닌, 외로운 결단을 택했다.

결과는 이 회장의 승리였다.

한발 더 나아가 일본 반도체업체들이 불황을 우려해 설비투자를 축소할 때 오히려 공격적인 투자를 단행했다.

삼성은 스택방식을 도입한 뒤 불과 4년 만에 D램 반도체 세계 1위에 올랐다.

이 회장은 위기경영의 대가(大家)로 통한다.

신경영 이후에도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조직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방식으로 삼성맨들을 독려했다.

삼성 사사(社史)에 '잔치의 달'로 기록된 2002년 4월이 대표적이다.

당시 삼성은 사상 처음으로 소니의 시가총액을 앞지르고 분기 영업이익이 2조원을 넘어서는 등 잇따라 승전보를 울렸다.

이 회장은 다시 사장들을 불러모아 "잘나갈 때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항공기가 마하의 속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전체 소재를 바꿔야 하듯이, 이제 전체 사고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앞선 기업에 차이고, 뒤따라 오는 기업에 쫓기는 신세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반도체 호황으로 연간 영업이익이 20조원을 넘었던 2004년에도 그는 "모든 것이 잘 돌아가는 지금이 가장 큰 위기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방심할 수 있는 고비마다 위기경영은 새로운 도약으로 삼성을 이끄는 원동력이 됐다.

⊙ 창조경영으로 '창조의 삼성' 주문

'창조경영'도 이 회장의 대표적 경영스타일이다.

그는 2006년 미국 뉴욕에서 열린 '밴플리트 상'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삼성 안팎에선 오랜 해외 체류를 마치고 귀국한 지 7개월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 출장 기간이 길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고 출장은 뉴욕 런던 두바이 요코하마 등지로 40일 동안 이어졌다.

뉴욕에선 전자계열 사장들에게 프리미엄 시장을 공략할 창의적 제품을 내놓라고 주문했고, 런던에선 첼시 구단을 배우라고 강조했다.

두바이에선 셰이크 모하메드 총리의 창의적인 도시 개조를 배울 것을, 요코하마에선 반도체와 휴대폰에 이어 디스플레이도 글로벌 톱으로 키울 것을 당부했다.

이런 행보를 통해 이 회장이 전달하려던 핵심 메시지는 "지금의 모습에 안주해선 안 된다"였다.

그는 "21세기는 단순히 상품만 만들어 파는 시대가 아니라 창의력과 아이디어, 정보를 모아서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시대"라며 창조경영을 강조했다.

때로는 창의성을 위해 알하지 말고 놀아야 한다는 말까지 했다.

'관리의 삼성'으로 성장한 삼성을 '창조의 삼성'으로 도약시키려는 의도에서다.

⊙ 새롭게 주목받는 오너경영

이 회장의 복귀로 오너(owner)경영의 장점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그동안 삼성 등 한국 대기업의 눈부신 성장 비결로 전문가들은 신속하고 과감한 의사결정과 자원의 효율적인 배분을 특징으로 하는 오너경영을 들었다.

실제로 이 회장은 오너경영의 장점을 입증했다.

오너경영의 또 다른 장점은 단기 성과와 업적주의에 치우치는 전문경영인 체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5~10년 뒤를 내다보며 미래를 준비하는 경영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 회장은 신경영과 창조경영 등을 통해 항상 10년 뒤를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해외에서도 오너경영은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글로벌 컨설팅업체인 AT커니는 최근 25개 '글로벌 챔피언'을 선정하면서 1위와 3위에 닌텐도와 애플을 올렸다.

각각 이와타 사토루, 스티브 잡스라는 카리스마 넘치는 오너 기업인의 지휘 아래 지난해 금융위기에도 휩쓸리지 않고 뛰어난 실적을 올린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자본주의의 역사에서 빛나는 오너경영의 사례로는 스웨덴 발렌베리 가문이 꼽힌다.

발렌베리 기업집단은 지주회사격인 인베스터를 비롯 소니에릭슨 등을 보유한 가족 기업의 전형으로 5대째 가업을 승계하고 있다.

2000년 닷컴버블이 꺼지면서 계열사인 소니에릭슨과 ABB가 파선 직전까지 몰리자 발렌베리 가문은 인베스터를 통해 두 회사의 지분을 오히려 확대했다.

당시 스웨덴 언론은 '굿바이, 인베스터'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너의 과감한 결정에 주주들은 증시에서 '바이(buy)'로 화답했고,계열사들은 모두 정상을 회복했다.

발렌베리 기업집단은 금융위기에서도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벨기에 오스트리아 독일 네덜란드 스페인 이탈리아 스웨덴은 60% 이상의 기업이 특정 가문 소유다.

장경영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longr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