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적 사실을 바탕으로 공정하고 균형있게 서술

이념적 관점보다는 경제적 합리성 먼저 고려해야
[Cover Story] 새 경제교과서,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
경제 교과서를 둘러싼 논쟁은 현실의 경제 문제를 놓고 벌어지는 논쟁과 비슷하다.

성장과 분배, 시장 자율과 정부 개입, 기업 활동의 자유와 노동자의 권리 등 결론을 내기 쉽지 않은 문제들에 대한 논쟁이 경제 교과서를 놓고도 진행돼 왔다.

똑같은 교과서를 두고서도 한쪽에서는 "자본주의 체제를 부정하고 반기업 정서를 부추긴다"고 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기업 편향적이고 노동자에게 적대적"이라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교육과학기술부가 내놓은 '경제 교과서 집필 기준'(이하 집필 기준)은 정확성과 공정성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있다.

교과서가 논쟁적인 주제들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줄 수는 없지만 객관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경제 이론과 현상을 서술함으로써 학생들이 균형 잡힌 시각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 과다하게 기업을 폄하하는 표현들

집필 기준은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 과정과 세계화의 영향, 노사관계 등 흔히 이념 논쟁으로 번지곤 하는 주제들을 교과서에서 어떤 방식으로 다뤄야 하는지에 대해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경제 성장 과정에 대해서는 한국이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경제 성장을 이뤘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 첫 번째 기준이다.

이때 통계자료를 활용해 교과서의 객관성을 높이도록 했다.

또한 이 같은 빠른 경제 성장은 정부, 기업가, 노동자 등 전 국민의 노력으로 이룬 것이라는 점을 밝히도록 했다.

경제 성장 과정에서 나타난 문제점을 다룰 때는 실증적이고 객관적인 자료에 기초해 서술하라는 것이 원칙이다.

경제 성장의 역사를 이념의 잣대로 판단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제시한 기준이다.

세계화와 자유무역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함께 보여주도록 했다.

세계화와 자유무역으로 국가 간 자원 배분이 효율적으로 이뤄지는 반면 일부 산업과 계층은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점을 균형 있게 다뤄야 한다는 의미다.

기업 활동에 대해서는 기업의 자유롭고 창의적인 활동이 사회 발전에 기여한다는 것을 밝히도록 하고 기업의 합법적인 경제 활동을 폄하하는 표현을 쓰지 않도록 한다는 점을 명시했다.

그간 경제 교과서가 기업 활동의 자유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함으로써 기업의 본질과 존재 의의에 대한 오해를 낳았다는 비판을 받아들인 것이다.

동시에 노동이나 노동자를 폄하하는 표현 또한 쓰지 않는다는 원칙을 제시해 교과서 내용이 기업 편향적으로 흐르지 않도록 했다.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노사 공동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도 앞으로 경제 교과서에 들어가야 하는 내용이다.

⊙ 시장 · 정부 역할 공정하게 서술

시장과 정부의 역할을 어떻게 설명할지에 대한 기준도 제시됐다.

첫 번째 원칙은 우리나라가 자유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밝히는 것이다.

그런 전제 하에 시장의 기능에도 한계가 있으며 이를 보완하기 위해 정부가 시장에 개입할 수도 있다는 점을 설명하도록 했다.

단, 정부의 개입도 한계를 갖고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다.

경제 주체의 선택은 도덕이나 윤리보다는 경제적 효율성에 따라 이뤄진다는 관점에서 서술해야 한다.

소비자의 행위에 대해 지나치게 당위적이거나 윤리적인 판단을 교과서에 담아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경제 체제에 대해서는 자본주의 공산주의 등 각 경제 체제의 개념부터 정확히 설명하는 것이 첫 번째 원칙으로 제시됐다.

그런 다음 시장경제가 오늘날 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주요 방식이 되고 있으며 현실에서는 다양한 경제 체제의 특징이 혼합돼 나타난다는 점도 설명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신용' '자산관리' '잉여' 등 교과서에 새롭게 도입되는 개념에 대한 서술 기준도 나와 있다.

학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생활 속 사례를 통해 개념을 설명하고 합리적인 투자와 개인 신용 관리 등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 원칙이다.

이 밖에 특정 경제주체나 특정 직업에 대한 편견이 개입되지 않도록 하고 사실에 대한 기술과 가치관에 따른 주장은 구분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통계자료는 공신력 있는 기관이 작성한 최신 자료를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다.

또 개념 정의와 이론 설명에 오류가 없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집필 기준 작성에 참여한 김정호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수석연구위원은 "현행 경제 교과서는 시장경제의 장점과 기업 활동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소홀히 다룬 반면 시장 기능의 한계와 정부 개입의 필요성은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며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균형 잡힌 교과서를 만들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유승호 한국경제신문 기자 usho@hankyung.com

-------------------------------------------------------------

미국 경제교과서 집필기준은…

개인 문제가 아닌 시스템의 작동 다뤄… 사실과 가치판단 엄격히 구분

경제 교과서에 대한 집필 기준을 정부가 정하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만이 아니다. 미국도 중앙 정부와 주 정부 차원의 교과서 집필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한경동 한국외국어대 경제학부 교수는 지난 7일 열린 '좋은 경제교과서 만들기' 세미나에서 미국의 경제 교과서 집필 기준을 소개했다.

미국은 학생들이 선량한 시민이 될 수 있도록 돕는다는 것을 경제 교과서의 첫 번째 목표로 명시하고 있다.

경제에 대한 전문지식을 가르치기보다는 시장경제 체제의 일원으로서 일반적인 경제 현상을 이해하고 합리적인 경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둔다는 의미다.

두 번째 원칙은 경제학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시스템의 작동을 다루는 학문이라는 관점에서 교과서를 서술하라는 것이다.

한 교수는 "학생들에게 경제를 종합적이고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심어주겠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연장선상에서 거시경제와 미시경제,국내 경제와 국제 경제를 동시에 다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는 사실에 대한 설명 외에 분석을 덧붙여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사실과 가치 판단을 구분해야 한다는 점도 미국 정부가 강조하는 원칙이다.

학생들이 논쟁적 주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도록 하되 이에 대해 서술할 때는 사실과 가치 판단을 구분하고 공정한 입장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밖에 사실관계에 대한 오류는 최소화해야 한다고 미국 정부는 규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