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보 개혁 반대론자들의 주장은…
[Cover Story] “얼굴도 모르는 사람 의료비를 왜 내가 낸 세금으로 내주지?”
"나라에서 국민들의 의료비 부담을 덜어준다는 게 뭐가 나쁜 거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자신의 정치적 생명까지 걸었다는 미국의 건강보험 개혁 논란을 지켜본 사람들이라면 거의 백이면 백 한번쯤 느꼈을 의문점이다.

모든 국민이 국가가 제공하는 건보 혜택을 받고 있는 한국에선 민간보험을 주축으로 한 미국의 건보제도 자체가 너무나 낯설고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 의료보장 체계의 질은 '세계 제일의 선진국'이란 명예에 걸맞지 않게 매우 뒤떨어져 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평가한 미국의 의료 경쟁력은 세계 37위로, 코스타리카나 쿠바 등 중남미 빈국들과 동급 수준이다.

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인 한 사람당 지출한 의료비는 평균 7290달러(약 830만원)로 다른 회원국의 2배 수준에 달했다.

미국은 왜 '세계 최악'이란 오명을 뒤집어쓰면서까지 지금의 의료보험 시스템을 고집해 왔을까.

또 오바마 행정부가 추진한 건보개혁이 왜 그토록 격렬한 반대에 부딪쳤을까.

또 미국의 국내 사정일 뿐으로 여겨질 수 있는 건보개혁이 이토록 세계적인 이슈로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건보 시스템에 미국의 역사와 가치관이 모두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건보개혁 논쟁은 곧 미국의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 질문과 연결돼 있다.

우선 미국의 현 건보 체계에 대해 들여다 보자.미국의 건강보험은 크게 사적보험(Health Plan)과 공적보험으로 구분된다.

사적보험은 개인 또는 기업이 가입하는 민간보험을 뜻하며, 보험 종류 및 가입 조건에 따라 의료기관의 서비스 질과 가격을 관리하는 시스템으로 구성돼 있다.

공적보험으로는 메디케어(Medicare)와 메디케이드(Medicaid), 공무원 및 군인 의료보험 등이 있다.

메디케어는 65세 이상 노인과 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며, 소득 및 재산수준에 따라 A~D의 4개 등급으로 구분해 총 보험비용의 50%까지 정부에서 보조해 주는 방식이다.

또 메디케이드는 저소득층이 대상이며 정부가 100% 보험금을 지원해 준다.

현재 미국에서 건보 수혜를 받는 국민들의 비율은 약 83%며 이 가운데 3분의 2가 사적보험에 가입돼 있다.

또 미 국민 가운데 건강보험에 가입하지 않았거나 못한 무보험자는 총 5400만명에 달한다.

오바마 행정부의 건보개혁법은 10년간 9400억달러를 투입,3200만명에게 추가로 혜택을 줘 가입률을 83%에서 2019년 95%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구상이다.

저소득층 및 장애인을 배려하는 건강보험인 메디케이드 대상을 확대하고,중산층에는 보험가입 보조금을 지원하는 데 집중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부모의 보험에 함께 가입할 수 있는 자녀 연령도 26세로 연장했다. 청년층에 건보 가입의 부담을 줄여주겠다는 의도다.

개혁법에는 자동차 운전면허증처럼 건강보험증 소지를 의무화하는 안도 들어 있다.

일반 개인 대상자들이 건보 가입을 거부할 경우 연간 최소 695달러의 벌금을 물리고,50인 이상을 고용하는 기업주가 종업원에게 건보 가입 지원을 하지 않을 경우에는 종업원 1인당 2000달러의 벌금도 회사에 부과키로 했다.

직장에서 건보 가입을 최대한 유도해 내기 위한 방안이다.

또 질병이 있다는 이유로 보험회사가 일방적으로 건보 가입을 거부할 수 없도록 하고,급격한 보험료 인상을 할 수 없도록 제재도 가할 수 있다.

그렇다면 건보개혁법의 반대 목소리에 담긴 논리는 어떤 것일까.

반대론자들의 주장은 크게 '자유'와 '세금', 그리고 '재정부족' 등 세 가지 키워드로 정리된다.

자유와 세금은 독립전쟁 이후 미국의 건국 과정에서 깊이 새겨진 DNA와 다름없는 것이고, 재원마련 논쟁은 금융위기 이후 전 세계적으로 불거진 재정적자 문제와 연관돼 있다.

미국은 유럽에서 구교의 탄압을 피해 신대륙으로 건너온 신교도(청교도인)들이 세운 나라다.

기본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고 정부 간섭을 싫어한다.

특히 청교도는 노동을 미덕으로,나태를 죄악으로 생각한다. 가난한 것은 기본적으로 개인 책임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건보 개혁에 반대하는 미국인들은 자기 스스로 열심히 돈을 벌어 의료보험비도 내고 건강도 알아서 챙기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재정 부담의 논란 뒤엔 이런 인식차가 깔려 있다.

또 이 같은 청교도들의 철학이 오늘날 미국 보수진영의 철학적 근간이 됐다. 이 때문에 보수파의 시각에선 오바마의 건보 개혁이 '미국의 건국 이념을 무시하고 국민을 타락시키는 행위'로 간주된다.

또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내가 낸 혈세를 왜 낭비해야 하느냐"는 미국 사회 특유의 정서적 거부감도 건보개혁을 늦춘 커다란 요인이다.

이 때문에 국민들 간에 찬반 의견도 여전히 팽팽히 맞서고 있다.

건보개혁법 통과 다음날인 지난 22일 USA투데이와 갤럽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49%가 법안을 지지한 반면, 40%는 법안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이런 정치 · 사회적 배경 때문에 지난 100년간 주로 진보 성향의 민주당 출신 대통령들이 추진해온 건보 개혁은 번번이 좌초됐다.

1934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사회보장제도를 구축하면서 전 국민에게 혜택을 주는 건강보험을 도입하려 했으나 미국의학협회의 반대로 실패했다.

1945년 해리 트루먼 대통령도 건보 개혁 10개년 계획을 추진했으나 사회주의적이라는 반대에 부딪쳐 좌절됐다.

그나마 성공을 거둔 것은 1965년 린든 존슨 대통령 정도.

그는 '위대한 사회'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복지 확대 정책을 펴면서 메디케어와 메디케이드를 도입했다.

이 역시 제도 도입 후엔 호응을 얻었지만 당시엔 사회주의 제도라며 강한 반대에 부딪쳤었다.

빌 클린턴 대통령도 건보 개혁을 추진했으나 실패했다.

오바마 대통령 역시 이번에 의보 개혁을 추진하면서 '사회주의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당초 야심차게 추진했던 공공의료보험은 정부가 '죽음의 패널'을 만들려 한다는 공화당의 정치적인 주장과 보험업계의 로비로 결국 도입이 무산됐다.

경제적으로는 건보개혁이 천문학적인 재정적자를 줄이는 데 실제로 기여할 것이냐가 관건이다.

미 정부의 올해 재정적자는 1조6000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정치 중립적인 미 의회예산국(CBO)은 개혁법이 시행되면 첫 10년간 1430억달러 등 향후 20년간 1조3000억달러의 재정적자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전체적인 의료비용을 줄이고,부유층에 세금을 더 걷는 방안을 통해서다.

또 각 주가 운영하는 의료보험상품 거래소가 설치되면 가입자들이 지금보다 12~20% 값싸게 의보상품을 구입할 수 있다는 게 CBO의 예상이다.

실제로 10년간 메디케어 지출비용을 5000억달러 삭감하고 연소득 25만달러 이상 부유층에 3.8%의 메디케어 세금을 신설하는 방안이 포함돼 있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공화당은 반대한다.

폴 라이언 공화당 의원은 이 계획이 결국 세금만 더 걷고 재정적자는 늘리는 '재정적자 괴물,프랑켄슈타인'을 만들 것이라고 비난했다.

이미아 한국경제신문 기자 mi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