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현대·LG 창업 회장들, 역경딛고 글로벌기업 일궈
[Cover Story] 가난한 나라를 세계 경제강국으로 이끈 한국의 기업가 정신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전 세계 경제질서의 판이 다시 짜여지고 있다.

위기 이전 세계를 호령하던 우량 기업이 하루 아침에 파산 선고를 받는 일이 수시로 발생한다.

이름이 없던 신진 기업이 글로벌 기업으로 발돋움하는 일도 심심치않게 일어난다.

전문가들은 기업, 나아가 국가의 사활을 결정하는 요소로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을 꼽고 있다.

기술혁신을 통해 창조적인 파괴에 앞장서는 기업가들이 더 많이 나오지 않으면 발전은 커녕, 현상유지도 어렵다는 지적이다.

⊙ 기업가 정신이 나라의 운명 결정

기업가 정신의 뜻은 시대에 따라 바뀌어 왔다.

이 용어를 처음 쓴 사람은 미국의 경제학자인 슘페터다.

그는 새로운 생산방식, 남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상품 등을 통해 새로운 시장에 도전하는 기업가들이 많아야 기업과 국가가 번영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최근에는 슘페터의 전통적 개념에 △공정한 경쟁 △인재 양성 △사회적 책임 등을 더해야 한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세계적인 경영학자인 피터 드러커가 '넥스트 소사이어티'라는 저서에서 "한국은 기업가정신이 살아 있는 나라"라고 극찬했던 적이 있다.

삼성, 현대자동차, LG 등 주요 대기업들이 위기를 감수하고 새로운 도전을 감행, 글로벌 기업으로 우뚝 섰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그러나 기업가 정신과 관련된 한국의 명성은 갈수록 빛이 바래는 추세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집계해 발표하는 기업가정신 지표는 1977년 72.3에서 최근 5.0 수준까지 크게 떨어졌다.

한국 기업들이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진단이다.

주요 대기업 창업주들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최근들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것도 이 같은 현상과 관련이 있다.

기업가 정신이 사라지고 있다는 위기감이 과거 '산업 영웅'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표출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 "삼성의 존재 이유는 사업보국"

올해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회장이 태어난지 100년째 되는 해다.

그의 창업사는 '도전'과 '모험'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이 회장은 1938년 삼성상회 창업 이후 1950년대부터 1~2년에 한 개씩 새로운 기업을 세웠다.

제일제당, 제일모직, 삼성전자, 삼성생명 등이 모두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70대에는 노익장을 과시하며 반도체 창업을 총지휘했다.

그의 좌우명은 사업보국(事業報國)이었다. 기업은 단순히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국가에 기여해야 한다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시대가 필요로 하는 산업이 무엇인지를 살펴 창업 분야를 결정했다.

1953년에 설립한 제일제당이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먹을 것이 부족하다는 점에 착안해 수입에 의존해 왔던 설탕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제일제당이 만든 설탕은 낮은 가격으로 수입제품을 급속히 대체하며 시장점유율 70%를 차지하게 된다.

먹을 것 다음에 입을 것을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만든 회사가 제일모직이다.

한국비료 역시 같은 생각으로 설립한 회사다. 농업을 주로 하는 나라에 비료공장이 전혀 없다는 점에 착안, 사업을 일으켰다.

삼성 관계자는 "이병철 회장은 국가와 국민이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해 사회에 기여하면 돈은 저절로 벌린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 소 판 돈을 들고 가출한 소년이…

현대그룹의 창업자인 정주영 회장은 부농의 아들이었던 이병철 회장과 달리 맨손에서 기업을 일군 경영자다.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아버지의 소 판 돈을 들고 가출을 감행한 것이 현대그룹의 시작이었다.

'기업가 정신'에 대해 논의할 때 정 회장을 첫 손에 꼽는 전문가들이 많은 것도 그의 성장배경과 연관이 깊다.

정 회장은 휴전 직후인 1953년 아무런 기술과 경험 없이 낙동강 고령교 복구공사에 뛰어들었다.

장비, 기술 부족은 물론 홍수까지 겹쳐 몇 배의 공사비를 들여도 완공이 어려워진 상황이었다.

주위에서 모두 포기하라고 했지만 형제들 돈까지 모두 끌어들여 결국 공사를 완성했다.

이때 얻은 신용으로 정 회장은 전후 최대 공사라는 한강 인도교 복구공사를 수주, 현대건설의 기반을 구축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조선업을 시작한 이야기는 현대그룹의 기업 광고 소재로 활용될 만큼 널리 알려져 있다.

1972년 정 회장은 울산 미포만 사진 한 장만 손에 든 채 그리스 거물 해운업자 리바노스를 만나 26만t짜리 배 2척을 주문받았다.

조선소가 아예 없는 상황에서 주문을 따낸 것.

현대중공업은 조선소 건립과 동시에 2척의 배를 진수시킨 세계 조선사에 유일한 기록을 남겼다.

정 회장은 위험 부담을 감수해서라도 독자 기술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1967년 미국 포드사로부터 자동차 조립기지화 제안을 받았으나 일언지하에 거절한 일화가 이를 증명한다.

정 회장은 독자적으로 포니 등의 자동차를 개발했다. 당시 포드사의 제안을 받아들였더라면 지금의 현대자동차는 없었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 라디오에서 시작한 전자대국의 꿈

"기술없어 못 만든다고? 외국가서라도 배워 와."

1958년 4월,구인회 LG그룹 창업회장은 락희화학(현 LG화학) 임원들을 모아놓고 오랫동안 벼르던 이야기를 쏟아냈다.

윤욱현 당시 락희화학 기획실장이 제출한 전자제품 생산공장 건립안에 대해 임원들이 "기술수준이 낮아서 힘들다"는 의견을 내놓자 "기술이 없으면 외국 가서 배워오고,그래도 안 되면 외국 기술자 초빙하면 될 거 아니냐"고 일갈했다.

전자업계 관계자는 이 때를 한국의 전자산업이 태동을 알리는 순간으로 기록한다.

구 회장이 쉽게 할 수 있는 사업만 고집했더라면 국내 최초의 라디오 '금성 A-501' 개발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구 회장은 수입에 의존했던 가전제품을 국산화하는데 앞장섰던 인물이다.

LG전자의 전신인 금성사는 1960년 3월 선풍기 'D-301'을,1961년 7월 자동전화기 '금성 1호'를 잇달아 내놓았다.

모두 '최초의 국산'이라는 꼬리표를 단 제품들이다.

지금 한국은 이런 기업가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다.

송형석 한국경제신문 기자 clic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