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실히 빚 갚는 사람만 바보?

[Cover Story] 모럴 해저드 부추기는 개인회생제도 개정 '미소금융'도 논란
빚을 제 때에 갚지 못할 경우 금융채무불이행자(옛 신용불량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된다.

채무불이행자가 되면 은행 거래를 할수 없고 취직도 하기 어렵다.

신용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채를 갚지 못하는 사람들은 더욱 최악의 상황을 경험한다.

신문이나 TV프로그램에서도 가끔 소개되듯이 폭행 협박은 기본이며 가족이나 회사에 채무 연체 사실을 알리기도 하고 시도 때도 없이 집에 들이닥쳐 행패를 부리기도 한다.(물론 불법 채권 추심을 하지 않는 대부업체나 사채업자도 있고 남의 피같은 돈을 너무 쉽게 떼먹는 사람도 많다)

어떻든 한번 신용이 떨어지면 회복하기 어려운 생활고를 겪게 된다.

그래서 정부는 신용도가 낮아 금융회사에서 대출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 창업자금이나 사업운영 자금을 대출받을 수 있도록 ‘미소금융’이라는 사업을 시작했다.

또 법무부는 법원을 통한 개인 회생 제도를 채무자에게 유리하게 바꾸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채무자들을 위한다는 정책은 채권자들에게는 손해가 되는 제로섬 게임이다.

채무자의 권리만 강조하다 보면 돈을 빌려주려는 사람이 줄어들 것이고 결국은 정작 돈이 필요한 사람이 돈을 빌릴 수 없게 되는 역설도 나타난다.

누군가는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 되는 것이다.

⊙ 채무자 편 들어주는 법무부?

한번의 실수로 채무불이행자가 됐다고 해서 완전히 사회에서 낙오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래서 채무불이행자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하는 ‘개인 회생’과 ‘개인 파산’이라는 법적 제도가 있다.

개인회생은 일정 소득이 있는 채무자가 신청할 수 있다.

개인회생을 허용 받으면 법원이 책정한 생계비를 뺀 일정액을 매달 갚아나가야 한다.

가령 월 소득이 200만원인 A씨가 개인회생을 신청한다고 치자.

법원에서 인정하는 3인 가족 기준 최저생계비가 162만원이기 때문에 이를 제외하고 매달 38만원씩을 최대 5년까지만 갚으면 된다.

빚이 많더라도 정해진 기간까지만 생계비를 제외한 금액을 내면 빚이 없어지는 것이다.

이에 반해 개인파산은 아예 빚 갚을 능력을 상실한 사람이 신청하는 것으로 빚을 갚아야 하는 의무 자체를 면제해주는 제도다.

법무부는 최근 개인회생에 대한 기준을 바꾸려 하고 있다.

개인 회생자가 돈을 납부하는 기간을 5년에서 3년으로 줄이고 예외적인 경우만 5년으로 하는 내용으로 법 개정을 추진 중이다.

위에서 사례로 든 A씨의 경우 갚아야 할 돈이 2280만원(38만원×60개월)에서 1368만원(38만원×36개월)으로 줄어드는 셈이다.

법무부 관계자는 “미국 일본 네덜란드 등 선진국들은 변제기간이 3년인데 우리나라는 그에 비해 변제기간이 길어 채무자들의 부담이 크다”며 법 개정 취지를 설명했다.

이에 대해 금융정책을 결정하는 금융위원회는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채무불이행자에게 재기의 기회를 줘야 한다는데는 공감하지만 지나치게 채무자에게 유리하게 법을 고칠 경우 우리 사회가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빚을 지고도 안 갚으면 그만이라 생각하는 ‘배째라’ 족이 급증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채무불이행자가 속출하면 우선은 돈을 빌려준 채권자들이 당연히 손해를 본다.

그러나 점차 그 손해는 확대되고 선량한 사람들까지 피해를 입게 된다.

성실하게 빚을 갚는 사람들은 돈을 떼먹는 사람들의 돈까지 갚아야 하는 결과에 직면하게 된다.

은행은 자선사업을 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불행히도 세상에 순수한 자선사업은 거의 없다) 빚을 갚지 않는 경우까지 감안해 대출 이자를 정하는데 빚을 떼먹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이자가 올라가고 결국 성실하게 갚는 사람들까지 비싼 이자를 물어야 한다.

여기서 진짜 문제가 발생한다.

이자가 낮으면 빌린 돈을 갚기 쉽지만 이자가 비싸지면 그만큼 많은 돈을 갚아야 하고 결국 갚기 어려워진다.

그렇게 되면 돈을 갚지 못하는 사람이 점차 늘어난다. 그러면 이자는 더욱 올라가고 못갚는 사람은 더 늘어나고….

선의로 시작한 정책이 좋지 않은 결과를 낳는 것이다.세상 일은 이렇게 복잡하다.

⊙ 미소금융,상담자 8천명에 실제 대출은 24건뿐

미소금융도 선의에서 시작한 정책이다.

신용등급이 낮아 은행에서 돈일 빌릴 수 없는 사람에게 금융기관이나 기업들이 일정한 금액을 출연해 미소금융이라는 재단을 설립해 돈을 빌려주는 것이다.

7000억원의 휴면예금을 동원했고 기업들과 금융회사가 수천억원씩 모두 1조5000억원을 출연해 미소기금을 만들어 돈을 빌려주기 시작한지 한달여가 되었다.

방글라데시의 그라민 은행을 본떠 만든 제도이다.

이 나라에서 그라민은행을 만들어 서민을 구제한 사람은 유누스라는 분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한국의 미소금융은 그러나 아직 별다른 실적이 없다.

진정한 자활의지를 가지고 인생을 다시 일으켜보고자 하는 사람보다는 확실한 비전이나 계획 없이 쉽게 돈을 빌려 쓰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미소금융은 낮은 신용등급의 저소득층에 싼 이자로 사업자금을 빌려준다.(쓰고나면 없어져 버리는 생활자금이 아니다)

미소금융은 금리가 매우 낮다.연 4.5%다.

이 이자율은 최상위 신용등급을 가진 사람이 은행에서 신용대출을 받을때 적용 받는 금리다.

7~10등급인 사람이 4~6등급인 사람보다 낮은 이자에 돈을 빌릴 수 있는 ‘금리 역전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물론 가난한 서민을 돕자는 것이니 취지를 나무랄 수는 없다.

방글라데시의 그라민은행은 떼이는 돈을 감안해 연 15~20% 정도의 높은 금리로 돈을 빌려주고 있다.

미소금융도 이 수준까지 금리를 끌어올리지 않으면 미소금융 재원이 금새 고갈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미소금융을 ‘공돈’이라고 생각하고 무조건 돈을 빌리고 보자는 사람들만 몰리는 것도 문제다.

미소금융의 한 상담원은 “대출 요건 기준을 충족시키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며 “자활의지가 강한 사람들도 상대적으로 적다”고 말했다.

작년 12월 15일부터 1월15일까지 한달간 8100명이 직접 방문해 1대1 상담을 했으나 실제 대출이 이뤄진 것은 24건 1억여원에 지나지 않는다.

많아도 문제요 적어도 문제인 그런 도덕적 해이가 구조화되는 선의 정책이다.

이태훈 한국경제신문 기자 bej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