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런 통일·정치적 욕심이 부작용 불렀지만

국제정치·경제·외교 무대에서 영향력 키워

"(독일) 통일은 반세기 이후에나 하는 것이 좋다."

서독 총리시절(1969~1974년) 동방정책을 통해 동독과의 화해 · 협력을 추진한 빌리 브란트 전 총리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직후 외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페레스트로이카'(개혁)의 주역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 등 당시 유럽을 이끌던 강대국 지도자들의 반대 강도는 더 셌다.

대처 총리는 "(독일인들은) 남을 괴롭히며 침략적이며 이기적인데다 열등 콤플렉스까지 있는 사람들"이라며 독일 통일 후 정세가 어떻게 변할지 걱정했다.

미테랑 대통령도 "독일이 통일되면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가 과거에 점령했던 것보다 더 많은 영토를 집어삼킬 수 있다. 독일이 민족주의를 부추기는 '나쁜 과거'로 돌아가려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 통일은 어느날 갑자기 왔다

가능하면 '회피'하려고만 했던 '통일 독일' 시나리오를 '불가피' 쪽으로 돌린 데는 헬무트 콜 당시 서독 총리의 공이 컸다.

장벽이 무너지고 약 3주 후인 11월28일,그는 연방 의회에서 '독일 통일을 위한 10개 항 프로그램'을 발표해 처음으로 동독과 통일 협상을 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계획경제 포기 및 시장경제로의 전환,자유선거를 통한 통일 등 10개 항이 골자였다.

그런 다음,1990년 8월 '2(동 · 서독)+4(미국 · 영국 · 프랑스 · 소련)' 회담을 주도해 통일 독일에 대한 국제적 지지 확보에 나섰다.

콜의 이런 노력에 따라 유럽 강대국 지도자들 사이에 '독일 통일은 불가피하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면서 결국 두달 뒤 독일은 통일이라는 결실을 봤다.

독일 통일은 베를린 장벽 붕괴와 함께 이렇게 어느날 갑자기 왔다.

1989년 11월9일 베를린 장벽 붕괴는 말그대로 한순간이었고 이후 11개월 만에 통일이 됐다.

⊙ 통일비용,장벽 붕괴 당시 예상의 4.5배

독일 정부가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2008년까지 20년간 '통일 비용'으로 지출한 돈은 최소 1조2000억유로(2160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동독 지역의 연금생활자와 실업자 등에게 지원된 사회복지 비용이 절반(6300억유로)을 차지했고,철도 도로 통신망 등 인프라 구축(1600억유로)과 농업지원(900억유로)에도 많은 돈이 지원됐다.

통일비용 1조2000억유로는 장벽 붕괴 당시 예상됐던 1조마르크(약 475조원)의 약 4.5배에 해당하는 거액이다.

동독 주민의 대량 실업 사태에 따른 사회복지 비용 지출이 예상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동독의 2008년 실업률은 14.7%로 여전히 서독(7.2%)보다 두 배 이상 높다.

지금도 매년 연간 1000억유로 정도의 돈이 옛 동독지역에 지원되고 있다.

이는 독일 연간 국내총생산(GDP) 2조5000억유로(2008년)의 4% 수준이다.

⊙ 정치적 욕심 때문에 통일과정 왜곡

베를린 장벽 붕괴 후 헬무트 콜 서독 총리는 집권을 연장하기 위해 총선용으로 동 · 서독의 화폐 통합을 서둘렀고 동독 지역의 부동산에 대한 서독 사람들의 권리를 인정했다.

이 두가지 정치적 조치가 결과적으로 통일비용을 키우는 원인이 됐다.

독일 할레 경제연구소의 거시경제 연구실장인 우도 루드비히(Udo Ludwig) 박사는 동 · 서독 마르크화의 1 대 1 교환방식을 '최대 실책'으로 꼽으며,"한국은 아직 시간이 있으니 북한 경제의 자립성을 해치지 않는 방향으로 통일을 준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당시 동 · 서 마르크화 교환비율을 시장 환율(당시 4 대 1 정도)과 동떨어지게 1 대 1로 교환해준 점이 가장 큰 실수였다는 것이다.

동독 주민들이 보유하고 있는 화폐 가치를 높게 평가해 줘서 구매력을 높여주는 조치였지만 결과적으로 이 때문에 동독 지역은 경쟁력을 잃게 됐다.

동독 지역을 부흥시키려면 공장도 짓고 고용을 늘려서 동독 사람들이 자력으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줘야 되는 데 화폐통합 때문에 인건비가 사실상 4배로 올라가니까 기업들이 공장을 세울 유인이 없어졌다.

또 동독 제품 가격이 폭등하고 동독 기업에 엄청난 비용 충격을 초래해 수많은 동독기업이 망했다.

이와 함께 동독 출신으로 서독에 사는 사람들의 동독 내 부동산 권리를 인정해 준 결과 동독 지역 땅값이 급등했다.

인건비와 땅값이 높은 상황에서 서독의 민간자본이나 외국자본이 동독 지역에 투자하길 꺼리니까 정부의 투 · 융자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동독 지역의 고실업 문제는 이런 잘못된 정책의 결과다.

⊙ 눈부신 경제성장,독일의 부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독 지역의 경제 성장은 비슷한 시기에 민주화된 다른 동유럽 국가들에 비해 눈부셨다.

쾰른에 본부를 둔 IW연구소에 따르면 1991년 서독의 33% 수준에 불과했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현재는 70%로 늘었다.

독일 경제 전체에서 동독 지역이 차지하는 비중은 커졌다.

1992년 동독 산업생산은 전체 독일의 3.4%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10%로 늘었다.

수출에서 동독이 차지하는 비중은 같은 기간 3배 증가해 33%로 올라갔다.

경제력 향상으로 평균 수명도 크게 늘었다.

사회간접자본을 비롯한 주거환경도 통일 이후 빠르게 확충됐다.

초고속 인터넷망이나 고속도로는 동독 지역이 오히려 서독 지역보다 앞선다는 평가도 나온다.

자연환경 보존상태도 동독이 오히려 더 나아 희귀 · 야생 동식물이 서독 지역보다 더 많이 서식하고 있어 자연친화적인 개발이란 평가도 나온다.

이와 함께 독일은 통일을 통해 냉전체제 해체와 유럽연합(EU) 결성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며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키웠다.

독일은 통일독일의 '막강 파워'를 두려워하는 영국,프랑스 등 주변 우방들의 우려를 씻고 그들의 견제를 피하려면 유럽연합이란 울타리 내에서 영향력을 키워나가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독일은 동유럽 국가들의 EU 가입을 주선했고 서방국가 중에서 러시아와 가장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 '동서 간 균형자'로서 영향력을 발휘했다.

또 프랑스와 함께 유로화 도입 등 유럽의 경제 · 정치적 통합을 주도하고 세계화를 촉발해 EU를 미국의 대항마로 만들어 국제질서 다극화에 일조했다.

최근 기후변화 등 환경위기와 미국발 세계 금융위기 해결에서도 국제적인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

1 · 2차 세계대전 패전국이자 유대인 학살이란 '원죄' 탓에 국제 무대에서 '투명인간'처럼 숨죽였던 독일에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1년 뒤 통일은 국제정치 · 경제 · 외교 무대에서 국운의 전기가 된 것이다.

서기열 한국경제신문 기자 phil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