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선심 정책 남발해 경제 망쳐

국민의 수준이 나라의 품격을 결정
[Cover Story] 민주주의라는 '겉옷'입고 亡國病 퍼뜨리는 포퓰리즘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타락 현상이다.

냉정한 국가적 비전보다는 당장의 인기주의에 연연하게 되면 민주주의는 포퓰리즘으로 전락하게 된다.

선거철을 맞아 세금을 내려주거나,비용 부담은 도외시한 채 모든 사람에게 분배적 정의를 달성하겠다고 공약하면서 결국은 경제를 거덜내는 것이 그런 경우다.

포퓰리즘은 당연히 민주주의라는 겉옷을 입고 있다.

민주주의는 국민을 주인으로 떠받드는 정치 체제지만 허황한 약속을 남발하면서 기어이 국가 정책을 집단이기주의의 볼모로 만들고 만다.

포퓰리스트들은 정치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모든 국민에게 각자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다 해줄 것처럼 약속한다.

이들은 '국민 주권'을 내세우며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치적 · 경제적 변혁을 약속한다.

포퓰리스트들은 주로 평등정책을 통해 모든 서민들을 부자로 만들어줄 것처럼 약속한다.

대중의 감성을 자극해 대중의 이성적 판단을 흐리게 만들고 대중의 지지를 끌어내는 것이 포퓰리즘의 뚜렷한 특징이다.

그러나 포퓰리스트들이 단순히 대중을 속이기 위해서 대중영합적 정책을 펴는 것은 아니다.

포퓰리스트 스스로가 소위 분별없는 정치 열정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대중의 지적 수준에 따라 언제든 대중과 일체화되면서 대중의 열렬한 사랑을 받는 혹은 뜨거운 존경을 받는 지도자로 변신하게 된다.

독일의 히틀러나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같은 인물들이 바로 이런 사례에 속한다.

포퓰리스트 중에 대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지 않는 사람은 없다.

여기에 대중 민주주의의 비극이 있는 것이다.

⊙ 포퓰리즘의 생생한 사례,남미

포퓰리즘하면 가장 먼저 연상되는 지역이 라틴 아메리카다.

남미에서는 포퓰리스트가 정권을 잡은 사례가 많아 그 폐해가 컸다. 1950년대 아르헨티나의 후안 페론과 그의 아내 에바 페론이 대표적이다.

최근에는 베네수엘라의 차베스가 등장했다. 페론은 외국인 소유의 철도 · 전화 회사들을 국유화하고 모든 외채에 대한 지불 중단을 선언했다.

"외국인들이 들어와 우리 돈을 다 가져간다"는 구호로 국민의 분노를 결집하고 이를 정권의 에너지로 키우게 되면 포퓰리즘이 성립한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임금을 올려주고 여성의 권익 신장에도 노력했다.

페론은 높은 임금,싼 쇠고기 등 대중의 구체적 요구를 만족시켜 주면서 독재정치를 했다.

에바 페론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투쟁한 전설적 사회운동가'라는 찬사와 아르헨티나를 망친 '포퓰리즘의 대명사'라는 악평을 동시에 듣는다.

그래서 에바를 '거룩한 악녀이자 천한 성녀'라는 말로 압축하는 사람도 있다. 그녀는 의료 장비를 실은 기차를 타고 전국을 누비면서 무료 진료를 실시했고,기업가로부터 빼앗다시피 자선기금을 조성해 가난한 대중을 위해 썼다.

또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을 만들어 전국에 학교 병원 고아원 등 자선 구호 시설을 세웠다.

국민들은 이에 열광했다.

1946년 페론의 대통령 당선으로 시작된 페론주의는 독재와 부패,시혜적인 복지정책,수입대체 전략 실패,자본재 수입 증가에 따른 외화 위기 등으로 1955년 쿠데타에 의해 막을 내렸다.

하지만 페론이 실각한 후에도 아르헨티나 국민은 페론과 에바 시대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했다.

페론은 78세가 된 1972년 11월,50만 인파의 열렬한 환호 속에서 귀국했고 이듬해 9월 62%의 지지율로 다시 한번 대통령에 당선됐다.

포퓰리즘의 위력을 보여주는 사례다.

남미 포퓰리즘의 새로운 기수는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이다.

공수부대 장교 출신인 차베스는 1992년 쿠데타를 시도했다가 실패한 후 1999년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됐다. 차베스는 미국 국적의 전력 · 전화 · 통신회사 등과 외국 석유기업들을 모두 국유화했다.

또 '21세기 사회주의' '빈민에게 권력을'이라는 구호를 내걸며 빈민에게 무료 의료 ·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고 식료품비를 보조함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의 환심을 샀다.

차베스는 중산층의 반발로 2002년 파업과 50만명 규모의 시위,그리고 쿠데타로 대통령직을 사임하게 됐지만 친 차베스 세력의 전국 규모 민중봉기와 친위 쿠데타로 이틀 만에 대통령직에 복귀했다.

차베스는 반미 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주변 국가에 대한 경제 지원에도 공을 들였다.

쿠바에 국제 유가의 절반가격으로 석유를 공급하는데 이는 쿠바에만 1년에 22억달러 규모의 지원을 해주는 셈이다.

심지어 영국 런던의 저소득층 시민들의 버스 요금을 반값으로 깎아주기 위해 1년에 3200만달러를 쓰기도 한다.

2003년 이후 그가 이런 식으로 라틴아메리카를 비롯한 세계 각국 좌파 연대를 강화하기 위해 쓴 돈이 총 300억달러나 된다.

⊙ 계속되는 포퓰리즘,경계해야

포퓰리즘은 선진국과 후진국을 가리지 않는다.

포퓰리즘의 대부분은 좌파이지만 우파에도 포퓰리즘이 있다.

독일의 히틀러가 대표적인 우파 포퓰리스트였다.

대중의 열망을 한몸에 끌어안으면서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다는 점에서 사실 대부분의 독재자는 동시에 포퓰리스트에 가깝다.

오늘의 유럽에도 포퓰리즘 세력이 있다.

유럽의 포퓰리즘은 극단주의자,분리주의자,문화적 보수주의자 등 우익 진영에서 두드러진다.

프랑스의 르펜,오스트리아의 하이더 등이 대표적인데 주로 반이민주의로 외국인 혐오증을 부추긴다.

카사노바 이미지로 성추문이 끊이지 않는 이탈리아의 베를루스코니 총리도 영세상인들과 보통사람들의 이익을 옹호하고 기득권 계층, 정치인들과 담을 쌓고 있는 포퓰리스트로 분류된다.

그는 대중의 감정에 와닿는 구호와 색상,마스코트를 만들어 인기를 누렸다.

일본에서는 '자민당을 바꾸자,일본을 바꾸자!'라는 단순 명료한 슬로건으로 개혁을 추진하면서 국민들의 인기를 모은 고이즈미 총리가 포퓰리즘 인물로 거론된다.

우리나라도 수익성 없는 지방공항 건설이나 지역 균형 개발을 강조한 공기업 지방이전,혁신도시 건설 등이 대표적 포퓰리즘 정책으로 꼽힌다.

무언가를 베풀어주는 한 정책으로 서민들의 마음을 파고 든다.

대중 연설에 능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을 포퓰리스트로 보는 시각도 있다.

정재형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j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