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만한 양반들, 탐관오리 판치는 절망의 나라” 쓴소리
[Cover Story] 비숍 눈에 비친 100년前 한국은 ‘구제불능’ 국가
"모든 한국 사람들은 가난이 그들의 최고의 방어막이며,그와 그의 가족에게 음식과 옷을 주는 것 이외에 그가 소유한 모든 것은,탐욕스럽고 부정한 관리들에 의해 빼앗길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한국에 있을 때 나는 한국인들이 이 세계에서 가장 열등한 민족이 아닌가 의심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들의 상황을 가망없는 것으로 여기기도 했다."

이사벨라 비숍은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이라는 책 곳곳에서 양반과 관료들의 착취에 대해 지나치리 만큼 자주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것이 일반 백성들의 일하려는 욕구,잘 살려는 욕구를 좌절시킨다고 썼다.

그가 쓴 대로라면 구한말 당시 상황은 무질서,관료들의 부패,국가시스템 붕괴,조급한 위로부터의 개혁 실패 등으로 완전 구제불능이다.

동학운동이나 갑오개혁 등 구한말에 대한 많은 역사서가 있지만 당시 사회의 생활상에 대해 이 책처럼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서술한 책은 흔치 않다.

"양반이나 귀족들은 생업을 위한 일을 하지 말아야 하고,친척들에 의해 부양받는 것도 전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며 그들 중 일부는 아내가 바느질과 빨래로 남몰래 일해 먹고사는 사람도 있다.

……이들 기생충이나 다를 바 없는 계급은 여행할 때 그가 소집할 수 있는 만큼의 많은 하인을 데리고 다니는 것이 관습적으로 요구된다.

그는 하인이 인도하는 말을 타며 절대로 남에게 도움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 전통적인 관습이다.

그의 하인은 백성들을 윽박지르고 위협하여 닭과 달걀을 돈도 주지 않고 빼앗아 온다."

"백성들,즉 권리가 없는 대중은 세금을 어깨에 짊어져야 하고 양반에 의해 핍박받고 급료 없이 노동해야 할 뿐만 아니라,부채로 인해 혹독한 부역을 해야 하는 것이 보통이다.

상인이나 농민이 어느 정도의 현금을 저축했다는 소문이 나거나 알려지면 양반이나 관료는 빌려준 돈을 찾는다는 구실로 돈을 받아간다.

실제로 그것은 과세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은 탈세 혐의로 감옥에 갇혀서 그 자신이나 자신의 친척이 요구하는 돈을 지불할 때까지 매일 아침 매질을 당한다.

혹은 사실상 석방된 후 돈이 준비될 때까지 조금씩 먹으며 양반의 집에 붙잡혀 있게 되기 때문이다.

…… 귀족들은 집이나 땅을 살 때 돈을 주지 않고,관리들도 그 지불을 강요하지 않는 것이 매우 당연한 것이다."

이처럼 우리를 부정적으로 봤던 이사벨라는 러시아의 자치구 프리모르스키에 이주한 조선 사람들을 보고는 그런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솔직히 고백한다.

"같은 한국인인데도 정부의 간섭을 떠나 자치적으로 마을을 운영해 가는 그곳 이주민들은 달랐다.

깨끗하고 활기차고 한결같이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고국의 남성들이 지니고 있는 그 특유의 풀죽은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의심과 게으름과 쓸데없는 자부심,그리고 자기보다 나은 사람에 대한 노예근성은 어느새 주체성과 독립심으로 바뀌어 있었고,아주 당당하고 터프한 남자로 변해 있었다."

"나는 한국의 농부들이 일본 농부처럼 행복하고 근면하지 못할 이유를 전혀 알지 못한다.

다만 여기에는 중요한 단서가 있다.

그것은 누누이 강조했듯이 '생업에서 생기는 이익을 보호해 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나라,어떤 제도로부터 온 것이든 한국에서 행해지는 모든 개혁은 한국인들의 이 절박하고 자연스러운 갈망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이사벨라는 어느 민족보다도 부지런하고 우수한 성품을 지닌 사람들로 변해 있는 한국인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희망의 말로 결론을 맺는다.

"고국에서 살고 있는 한국 사람들도 정직한 정부 밑에서 그들의 생계를 보호받을 수 있게 된다면 참된 시민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청일전쟁 승패의 분수령이 된 전투가 벌어졌던 평양의 주민들이 일본군을 보는 시선에 대해 이사벨라가 남긴 기록은 우리의 상식에 반한다.

"사람들은 일본군을 아주 미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그들에 의해 평화로운 질서가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다.

평양사람들은 근대적으로 훈련받은 일본군이 떠나고 나면 시민들의 권리를 얕보고 시민들을 무수히 폭행하고 강탈하는 한국의 구식군대가 그들을 괴롭힐까봐 매우 걱정했다."

우리는 이사벨라의 기록을 통해 구한 말 당시 우리나라가 상시적인 부패와 계급구조,인프라 부족으로 저개발국가에 머물렀지만,한국인의 기질은 평상시보다 위기에 강하고 남이 멍석을 펴주는 것보다 제 스스로 일을 할 때 신명이 나는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일본의 침략과 수탈이 우리의 주체적 발전을 가로막았다는 통념이 일반적이지만 실패의 역사를 거울 삼는 우리 몫의 책임 찾기 역시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정재형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jj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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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라 비숍은 누구?
[Cover Story] 비숍 눈에 비친 100년前 한국은 ‘구제불능’ 국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쓴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은 서구인이 쓴 한국 관련 저서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책으로 방대한 주제와 자료,생생한 현장감과 실증성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개화기 연구의 필독서로 인정받고 있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살았던 시대는 '대영제국엔 해가 지지 않는다'는 말을 만든 빅토리아 여왕의 치세(1837~1901)로 영국의 최전성기였다.

이사벨라는 1854년 23세 때 캐나다와 미국 각지를 여행하고 「미국의 영국 여인」이라는 여행기를 썼다.

이 책은 45판까지 찍을 정도로 베스트셀러였다.

29세 때 아버지의 죽음과 남성 중심적인 시대 상황으로 우울증에 빠져 30대를 보냈다.

41세이던 1872년 건강을 되찾으려고 떠난 하와이 샌드위치섬에서 6개월을 보냈고 미국 로키산맥 요양소에서 몇 달을 보냈다.

이 때의 경험으로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해 「샌드위치섬에서의 6개월」「로키산맥의 어느 여인」을 간행했다.

하와이로부터 돌아온 뒤 이사벨라의 여행기는 여성적 감성과 사건 중심에서 지리학의 논리적이고 지적인 체계로 변했다.

이후 일본 홍콩 광둥성 말레이반도 등을 답사해 책을 썼고 1889년에는 중동지방을 답사한 후 여행기를 썼다.

1894년 2월부터 이후 4년 동안 네 차례에 걸쳐 한국은 드나들며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을 쓰게 됐다.

또 1898년 말에는 「양쯔강의 상류지역」을 간행했다.

영국왕립지리학회 최초의 여성 회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