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여러가지로 엇갈린다. 논란도 많다.

일제 강점기 이후 그가 통치했던 시기까지는 선각자나 독립운동가로서의 긍정적 이미지가 일반적이었지만 4·19 혁명 이후에는 반민주 독재자로 덧칠됐다.

그러나 이승만은 선각자,독립운동가와 반민주 독재자로 단순하게 규정하기에는 너무나 큰 인물이다.

그는 일제시대인 1910년대부터 박정희 시대가 열리는 1960년대까지 50년간 세계에 가장 널리 알려진 한국인이었다.

1919년 4월13일 상하이에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으며 29년이 흐른 뒤 수립된 대한민국 합법 정부의 초대 대통령도 이승만이었다.

민주주의·시장경제 일군 선각자

反민주 독재자 일방 매도는 잘못
[Cover Story] '임정 초대 대통령' 이승만 대한민국 건국 이끌었다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단지 그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건국 이후 반세기가 넘게 흐르는 동안 각종 정변이 많았고 이에 따라 정권이 바뀌었지만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대통령 중심제 △친미외교 △교육입국 등 이승만이 건국 후 12년 재임 기간 동안 다져놓은 국가의 기본 틀이 꾸준이 이어져 왔다고 볼 수 있다.

끊임없는 좌익,공산주의자들의 반발과 6 · 25전쟁을 극복하며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냈으며 토지 개혁을 통해 봉건 잔재를 청산하면서도 북한과 달리 유상몰수,유상분배 방식으로 시장경제 원칙을 지켰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 공부한 지식인들과 한민당 등 야당이 일본식 내각책임제를 주장할 때도 신생 대한민국은 왕조가 완전히 몰락해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없고 민족 내부 분열이 극심한 상태이므로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가 필요하다며 흔들리지 않았다.

또 1945년 당시 한반도 국제정세가 미 · 소 · 중 · 일 등 열강에 둘러싸여 있는 상황에서 일부 좌우합작파가 생각했듯이 중립을 지킨다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고 보고 미국이라는 강력한 우방을 잡기 위해 노력했다.

교육입국의 의지는 대한민국 번영의 밑거름이 됐다.

국가재정이 취약했기 때문에 이승만 본인이 솔선수범해 하와이에 있던 한인기독학원 재산을 팔아 인천에 인하공대(현 인하대)를 세웠고 이후 초대 상공부 장관 임영신이 퇴임 후 중앙대학을 세우는 등 국내외 수많은 독지가들이 사학재단을 설립했다.

결론적으로 보자면,이승만은 상하이 임시정부 대통령(1919~1925)과 대한민국 대통령(1948~1960)을 역임하며 한국 역사상 첫 공화정을 대표했다.

그는 전근대에서 근대로,식민지에서 신생 공화국으로 전환하는 시점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한국 역사의 일부가 됐다.

아직까지 그의 행적과 정치노선,정책 등에 대한 논란이 많지만 그의 과(過)가 너무 강조되면서 공(公)이 묻혀가는 게 안타깝다.

정재형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j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