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

갖은 역경뚫고 민주국가 초석
[Cover Story] 임시정부는 '조선왕조→대한민국' 징검다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은 대한민국의 탄생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합된 이후 우리 민족은 정치적 정통성이나 법적 정통성이 사라진 국가였다.

민족사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한 한민족의 국가 정통성은 3 · 1 독립운동으로 기사회생했고 임시정부가 탄생하면서 완전히 회복됐다.

그때까지의 독립운동이 조선의 독립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했던 반면 임시정부는 근대적 가치에 기반한 온전한 민주 국가를 염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해방 이후 우리나라가 민주 국가로 재탄생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의 탄생 배경

1919년 3 · 1 운동 이후 중국이나 미국에서 활약하던 독립운동가들은 독립국을 운영할 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하나의 과제로 생각했다.

이들은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될 자주 정부 수립에 너나 할 것 없이 뛰어들었다.

이로 인해 3 · 1운동 직후 세워진 비밀 정부만 해도 8 ~9군데나 됐다.

대표적인 것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자리 잡았던 대한국민의회, 연해주에 있던 국민의회, 이승만이 중심이 된 한성정부, 조선민국의회 등이었다.

중국 상하이에 뿌리를 내린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이들 임시정부를 통합해 새로운 임시정부를 만드는 대역사를 이루었다.

이들은 민주주의에 입각한 근대적 헌법을 갖추고,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하였다.

그리고 입법 기관인 임시 의정원,사법 기관인 법원,행정 기관인 국무원을 구성해 우리나라 최초의 3권 분립에 입각한 민주 공화제 정부로 출범했다.

임시정부의 헌법 1조는 '대한민국은 대한인민으로 조직한다'라고 규정, 조선을 잇는 한국인의 국가가 민주공화적 정치 체제라는 것을 확고하게 밝혔다.

물론 이 헌법 7조에 '대한민국은 구 황실을 우대한다'고 명기해 조선 왕가와의 완전한 단절을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변화였다.

임시정부가 중국에 수립된 이유는 상하이가 가장 혁명 활동이 강하던 진보적 지역이었던 데다 국제 정세를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곳이면서 동시에 세계로 연결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상하이는 프랑스가 관할하고 있어 정치 활동이 비교적 자유로웠다.

⊙ 임시정부의 활약

상하이 임시정부는 3 · 1운동 이후 국내와 해외에서 일어나고 있던 민족 독립운동을 보다 조직적이고 효과적으로 추진하는 중추기관 역할을 맡았다.

상하이 임시정부와 국내를 연결하는 조직은 연통제와 교통국이었다.

연통제는 임시정부의 지방 행정기관으로 국내의 각 도와 군,면에 독판,군감,면감을 두고 군자금의 송부와 정보 보고, 정부 문서 명령 전달 등을 수행했다.

교통국은 통신 기관으로 정보의 수집,분석,교환, 연락 업무를 관장했다.

몰론 임시정부 활동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임시정부는 이 자금을 애국 공채의 발행이나 국민의 의연금으로 마련했다.

이 가운데 미국 교포들이 가장 많은 자금을 댄 것으로 최근 연구 결과 밝혀지고 있다.

국내와 해외에서 모은 자금은 연통제나 교통국의 조직망에 의해 임시정부에 전달되었다.

이와 같이 마련된 자금은 임시정부의 활동비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운동가에게 전달되어 그들의 사기를 북돋워 주었다.

임시정부는 또한 만주에서 활동하는 독립군을 임시정부 직할의 군대로 개편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광복군 사령부,광복군 총영,육군 주만 참의부 등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직접 무장 부대를 편성하여 항전을 주도적으로 전개한 것은 1941년 한국 광복군이 창설된 이후였다.

임시정부는 기관지로 독립신문을 간행했으며 사료 편찬소를 두어 한 · 일 관계 사료집을 간행하기도 했다.

⊙ 임시정부의 힘들었던 역사

1919년 통합된 임시정부가 출범은 했지만 그 활동은 순조롭지 못했다.

임시정부의 운영 자금이 부족한 데다 민족 지도자들의 독립운동 노선이 각기 달랐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임시정부 조직은 자주 바뀌었고 독립운동에도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됐다.

더욱이 1932년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본군의 시라카와 대장을 폭탄으로 즉사시킨 후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일본군의 탄압은 한층 심해졌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가 일본군을 피해 중국 각처로 옮기게 되면서 독립운동에 많은 차질을 빚었다.

임시정부는 1932년 5월 이후 1940년까지 8년 동안 항저우 쑤저우 난징 창사 등 10여 곳을 전전하며 이동했다.

그러다가 1940년 중국의 서남 지역인 충칭(重京)에 정착했다.

이때부터 임시정부는 임시정부 역사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충칭에 정착한 임시정부는 숙원 사업인 국군으로서 광복군을 창설했다.

주석 김구의 진두 지휘하에 총사령 지청천(池靑天),참모장 이범석을 중심으로 1945년 11월 귀국할 때까지 직할 무장부대로 활용했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습격으로 인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충칭 임시정부는 일본과 독일에 각각 선전 포고를 하고 군대를 연합군의 일원으로 미얀마 · 사이판 · 필리핀 등지에 파견했다.

1944년에는 중국과 새로운 군사협정을 체결하고 독자적인 군사행동권을 얻기까지 했다.

1945년에는 국내 진입 작전의 일환으로 국내 정진군 총지휘부를 설립하고 미군의 OSS부대와 합동 작전으로 국내에 진입하려는 계획을 진행하던 중 8 · 15 광복을 맞았다.

광복을 맞이하자 11월29일 주요 간부들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지만 국내의 혼란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각과 정책이 계승되지 못했다.

그러나 1948년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에 임시정부의 지도 이념과 체제가 반영되어 광복 한국의 기초 이념이 되면서 임정의 임무는 마침표를 찍었다고 할 수 있다.

오춘호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ohch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