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임시정부는 대한민국의 모체”…임정 수립 90주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은 민족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려는 위대한 선택이었습니다. 실로 우리 대한민국의 뿌리요 정신적 토대라 할 수 있습니다. 임시정부의 기본정신인 대동단결(大同團結)처럼 우리가 이념과 지역과 계층을 뛰어넘어 하나가 된다면 어느 나라보다 먼저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된 지 90주년이 되는 날인 13일 이명박 대통령이 기념사에서 밝힌 내용이다.

우리 헌법은 전문에 '3 · 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못박고 있다.

대한민국은 임시정부로 인해 태어났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헌법도 가지고 있었고 국회(임시의정원)도 갖고 있었다.

물론 재판권도 있었다.

이른바 3권 분립이 이뤄진 민주공화정부였다.

이 정부가 탄생하기 한 달 전인 3 · 1운동 때에는 아직 조선과 대한제국에 대한 추억이 남아 있었다.

기미독립선언서에도 조선은 독립국이며 조선인은 자주민"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완연히 달랐다.

전제군주나 입헌군주제를 철저하게 부정하고 민주 민본 민권을 추구하는 민주공화제를 기본 이념으로 삼았다.

민족의 열망인 근대 국민주권국가 수립에 대한 욕구를 분명히 표출했다.

이러한 사상은 물론 임정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사상에서 찾을 수 있다.

이승만은 조선의 양반 지배 봉건 체제를 극도로 혐오했다.

심지어 "나라가 망한 것은 슬픈 일이지만 왕과 양반, 상투가 없어진 것은 시원하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이승만의 이러한 근대정신은 임시정부를 넘어서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에까지 이어졌다.

임시정부는 그러나 해방까지 어렵고 힘든 길을 걸었다.

임정은 일본의 탄압으로 근거지였던 상하이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1932년 고난의 행군을 한다.

항저우 전장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을 거쳐 드디어 1939년에는 충칭에 안착한다.

이를 두고 우리는 충칭 임시정부 시기라고 얘기한다.

'바람 앞의 등불'같은 심각한 국면에 이르기도 하였지만 이런 난관을 극복해가면서 무려 26년반 동안을 유지했다.

식민지 해방사에서 이처럼 오랜 기간 해방운동을 펼친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이런 노력 덕분에 2차 세계대전 이후 제 3세계의 독립을 논했던 카이로 선언에서 독립을 보장 받은 나라는 한국뿐이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임시정부가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되새겨보자.

그리고 독재자로만 알려져 있던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아보자.

오춘호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ohch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