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삼성전자, 외환위기 이후 日 소니 제치고 세계정상 ‘우뚝’
중국 속담에 '깊은 구덩이는 단숨에 뛰어 넘어라'는 말이 있다.

한 걸음씩 걸어서 넘을 경우 구덩이에 빠지게 되어 올라올 수 없으므로 바로 뛰어 넘어야 한다는 메시지다.

여기서 구덩이는 역경이나 위기다.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어 사람들이 옛 기술 제품을 거들떠 보지 않을 때 이 기업은 존립의 위기를 맞는 것처럼 위기는 기술의 변화와 환경의 변화가 있을 때 찾아 온다.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탈락하지만 위기를 극복하면 경쟁에서 1등으로 부상할 수 있다.

위기는 경쟁의 판도를 바꿔 놓을 수 있는 기회인 셈이다.

⊙ 삼성전자 외환위기 이후 세계기업으로

우리 나라의 삼성전자는 외환위기를 극복하면서 일본 소니를 제치고 세계 최고의 전자업체로 부상했다.

1946년 설립된 소니는 한국전쟁 특수를 누리면서 1960년대 초 세계 처음으로 트랜지스터 TV를 개발할 정도로 기술이 앞섰다.

삼성전자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 전자 제품을 수입해 분해하고 모방하면서 기술을 축적할 정도로 소니와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를 계기로 대역전극이 펼쳐졌다.

1980년대 들어 디지털 기술이 확산되면서 전자제품 시장에 큰 변화가 예고되자 삼성은 기존의 반도체 기술을 기반으로 LCD(액정표시장치) 휴대폰 등 디지털 전자 분야에 대한 투자를 크게 늘렸다.

반면 라디오 TV 등 오디오 비디오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일본 소니는 플레이스테이션 게임기 등 엔터테인먼트 시장을 개척하는 데 주력했다.

말하자면 삼성은 디지털 시장 자체의 변화에 초점을 맞춘 반면 소니는 기존 기술을 바탕으로 게임기라는 신시장을 개척했던 것이다.

두 회사의 실적은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극명하게 나타났다.

외환위기로 아시아 시장의 소비가 위축되자 게임기 시장은 더 이상 크지 않은 반면 TV는 LCD를 중심으로 수요가 꾸준히 늘었다.

특히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 원화가치가 급락하자 전자제품 전 분야에서 일본 제품과 가격 경쟁을 할 수 있었다.

소니는 게임기 시장의 실적 부진으로 한때 외국인을 CEO로 영입하는 등 실적 회복을 위해 안간힘을 썼다.

회사가치를 나타내는 주식 시가총액에서 삼성전자는 소니를 두 배 이상 앞지르고 있다.

⊙ IBM의 경우

삼성전자가 외환위기를 계기로 세계적 전자업체로 부상했다면 세계적인 컴퓨터 업체인 IBM은 디지털 사업 영역을 완전히 바꿔 1등을 달리고 있다.

대형 컴퓨터 제조업체였던 IBM은 1980년대 들어 '컴퓨터는 우리가 최고'라는 자만에 빠지면서 소비자들의 불만이 쌓이고 대규모 적자를 내기에 이르렀다.

이때 구원투수로 등장한 루 거스너 회장은 IBM의 사업을 완전히 바꾸는 혁신을 단행하게 된다.

컴퓨터 제조로는 더 이상 1등이 힘들다고 보고 '기업 경영에 필요한 컴퓨터 기기와 소프트웨어 관련 문제를 종합적으로 해결해 주는 솔루션업체'로 변신한 것이다.

거스너 회장은 솔루션회사로서 외부와 협조하는 데 장애가 되는 기존의 회사 조직을 폐쇄하면서까지 새 시장을 개척했다.

이렇게 위기를 극복한 IBM은 이제 컴퓨터 업체가 아닌 솔루션업체로서 다시 세계 정상을 지키고 있다.

⊙ 중동으로 나간 현대건설

국내 기업들 중에 위기를 극복하고 도약한 회사는 많다.

현대건설은 1970년대 석유가격 급등으로 국내 경기가 침체에 빠지자 당시 국내 기업들이 생각하지도 않았던 중동지역에 진출했다.

석유 수출로 많은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는 산유국에서 전후 복구 일감을 따 내며 현대는 세계시장에 이름을 알릴 수 있었다.

현대자동차 LG전자 SK 포스코 등도 그동안 크고 작은 위기를 극복한 고난 극복의 역사를 갖고 있다.

위기는 이처럼 기업들에 도약의 기회를 제공해 준다.

이는 위기에 직면한 기업의 사원들은 본능적으로 더 열심히 일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며 돌파구를 찾게 된다는 점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개인이나 국가도 마찬가지다.

위기를 맞으면 그동안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방안을 다시 생각하고 변화에 장애가 되었던 기존의 관습을 깨고 완전히 다른 새로운 방식을 추구하기도 한다.

일본의 근대화를 몰고 왔던 명치유신도 따지고 보면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함선을 이끌고 개항을 요구하는 충격적인 위기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조선 후기 사회를 변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 대동법도 임진왜란의 혼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1998년 외환위기 때 우리나라는 말 그대로 위기 상황이었지만 거꾸로 생각해 보면 위기의식이 있었기에 기업들은 부채를 줄여 차입경영 관행에서 벗어났고 금융회사들은 문을 활짝 열면서 선진 제도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당시 IMF 총재였던 미셸 캉드시가 한국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두고 '위장된 축복(disguised blessing)'이라고 말한 것은 위기가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다.

물론 그의 말을 희망을 가지라는 립서비스였다고도 볼 수 있지만 위기가 새로운 기회를 가져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박주병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jbpar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