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컨 탄생 200주년 맞아 美전역 추모 열기
에이브러햄 링컨 전 미국 대통령 탄생 200주년인 12일을 맞아 미 전역에서 추모열기가 뜨겁다.
링컨 열기에 불을 댕긴 것은 버락 오바마 44대 대통령이다.
오바마는 링컨이 흑인 노예해방을 선포한 이후 당선된 첫 흑인 미국 대통령이다.
흑인 노예해방을 선포했던 링컨 탄생 200주년에 미 역사상 첫 흑인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했다는 정치적 역사적 인종적 의미가 보태지면서 과거 어느 때보다 주목을 받고 있다.
⊙ 오바마의 링컨식 통합정치 주목
'검은 링컨'으로 불리는 오바마가 링컨식 통합정치를 추구하면서 링컨은 새로운 조명을 받고 있다.
링컨 탄생 200주년위원회 의장인 딕 더빈 상원의원은 8일 "미국의 경제적 도전이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오바마 대통령은 링컨 대통령과 같은 리더십과 용기를 보여줄 것으로 믿는다"고 각별한 시대적 의미를 강조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취임일 직전 링컨처럼 통합열차를 타고 워싱턴에 입성,링컨기념관에서 경축행사를 가졌다.
취임식 때는 링컨이 사용했던 성경에 손을 얹고 취임선서를 했다.
그는 링컨 탄생일 오전엔 워싱턴 링컨기념관에 헌화한 뒤 링컨의 정치적 고향이자 자신의 텃밭인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를 방문했다.
이로써 추모 열기는 절정에 달했다.
미국 로드아일랜드 주대법원장을 지냈던 프랭크 윌리엄은 워싱턴 지역 출신 학생들과 함께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을 낭송했다.
일리노이주를 비롯한 미국 곳곳에서 모인 학생들이 게티스버그 연설을 집단 낭송했다.
1865년 링컨이 저격당한 워싱턴 포드극장은 2007년 5월부터 진행된 보수공사를 마치고 링컨 탄생일에 맞춰 11일 재개관, 16일부터 일반에 공개됐다.
링컨이 1862년 노예해방 선언을 앞두고 5개월 동안 개인적 정치적 역사적인 고민과 결단을 내린 과정을 주제로 다룬 연극도 포드극장 무대에 오른다.
⊙ 링컨이 정치사에 남긴 발자취
링컨은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은 대통령이다.
링컨은 미국인 뿐 아니라 세계인에게 하나의 신화로 비친다.
분열과 혼란을 종식하고 미국을 하나의 통합된 국가로 만들었고 노예해방을 통해 인간의 자유와 인권을 보호한 위대한 지도자로 기억되고 있다.
링컨은 분열 위기에 처한 미국을 남북전쟁이라는 큰 대가를 치르면서 구해낸 영웅이었다.
링컨이 없었더라면 지금 미국은 50개의 작은 나라로 나뉘어 있을 것이란 말도 나온다.
그는 또 노예해방 선언으로 모두에게 자유로운 나라를 만든 위대한 성자(聖者)이자,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통일된 나라를 지켜내고 나서 암살범의 총탄에 희생된 순교자의 이미지도 갖고 있다.
특히 존 부스라는 열렬한 남부지지자 배우가 쏜 총에 맞아 숨진 날이 바로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수난절이어서 순교자적 이미지가 더욱 강하게 남아있다.
미국 역사에서 가장 고통받고 소외됐던 소수계층인 흑인을 처음 대통령으로 받아들인 미국인들이 링컨의 탄생 200주년을 더욱 열광적으로 맞이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미국 시사주간 타임은 최근 "우리가 링컨에 주목하는 것은 인종과 평등에 관한 그의 관점,그리고 남북전쟁에서 발휘한 그의 지도력"이라면서 "지금의 경제 상황을 고려할 때 링컨의 경제관에도 관심을 기울일 만하다"고 평가했다.
링컨은 기회의 평등을 강조했다.
그는 정부가 경제 발전을 위한 기반을 건설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었고,이 모든 것을 위한 기본 원칙이자 국가의 존재 이유가 국민에게 동등한 기회를 주는 것으로 생각했다.
링컨은 경제적 자유가 바로 정치적 자유의 초석이라는 점을 알았다.
그래서 노예경제를 타파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스스로 얻은 빵을 먹을 권리에서 흑인은 나와 더글러스뿐 아니라 모든 사람과 동등하다"고 강조했다.
⊙ 흑백평등 이상과 현실
흑인이 미국 땅에 첫발을 디딘 것은 1619년 이후 노예제도가 시작됐고 흑인들은 백인 정착자들에게 사람이 아닌 물건처럼 분배됐다.
그 뒤 400년 가까이 1200만~1500만명에 달하는 아프리카 흑인들이 노예로 끌려왔다.
이들 흑인 노예에 대한 인종적 사회적 속박과 차별은 처절했다.
흑인 노예는 말을 알아듣는 사유재산에 불과했고 소나 말과 다름없는 취급을 받았다.
흑인 노예가 백인의 아이를 낳더라도 그 아이는 흑인 노예 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흑인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이면 평생 흑인의 멍에와 굴레에서 살아야만 했다.
흑인들의 피와 눈물, 그리고 한이 서린 노예제도는 남북전쟁을 계기로 큰 전기를 맞았다.
링컨 대통령이 1862년 9월 남북전쟁 중에 노예해방을 선언했다.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다음 미 수정헌법 13조를 통해 노예제의 공식적인 종말을 선언했다.
그러나 미국의 흑백 인종차별은 노예제 폐지 선언만으로는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링컨 대통령의 암살이 예고했던 것처럼 흑인에 대한 뿌리깊은 차별과 편견은 그 이후에도 계속됐다.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흑인에 대한 폭력은 끝나지 않았고 미국 대법원에 의해 "서로 다른 인종은 동등하지만 분리될 수 있다"는 판결이 내려져 인종 분리주의가 정당화되기까지 했다.
미 의회가 불과 반세기 전인 1957년 모든 흑인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공민권법을 통과시켰지만,남부 주들은 이 법을 지키지 않았다.
이러한 냉혹한 차별도 흑인들의 자각과 희생에 의해 변화가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다.
흑인들은 올해로 정확히 100년 전인 1909년에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를 설립하면서 인권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했고 1960년대 마틴 루터 킹 목사로 대변되는 흑인인권운동 등을 계기로 흑인들도 정치 참여의 기회를 얻기 시작했다.
이처럼 결코 순탄치 않은 미국 흑인 역사 과정에서 링컨의 노예해방 선언이나 오바마 대통령 당선과 취임은 그 자체가 역사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라이스 전 국무장관은 작년 12월 CNN과의 인터뷰에서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과 관련,"앨라배마 버밍엄에서 차별받으며 자란 경험을 돌이켜보면 참으로 역사적 변화의 순간을 맞았다고 생각한다"고 평가했다.
또 오바마의 대통령 취임을 하루 앞두고 여론조사에서 3분의 2 이상이 흑백 간 인종 평등을 외쳐온 킹 목사의 꿈이 실현됐다는 결과가 나왔다.
CNN 리서치는 지난 1월 1245명(백인 787명,흑인 332명)의 성인남녀를 대상으로 한 전화설문 조사에서 흑인들 가운데 69%가 킹 목사의 꿈이 실현됐다고 답했다며 이는 작년 3월에 나온 34%보다 배 이상 높은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링컨 탄생 200주년에 흑인 최초 대통령 취임이 당장 취업이나 승진 등 현실적인 흑백 인종차별 문제를 해소할 것으로 기대해선 안 된다는 냉정한 평가도 없지 않다.
라이스 전 국무장관은 "오바마 대통령 당선으로 우리가 인종의 색깔을 차별하지 않는 컬러 블라인드가 됐다고 스스로 기만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미국의 흑인 여성인권 운동가인 말리크 미아는 "오바마의 승리는 태도의 변화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뛰어넘는다"며 "오바마의 승리로 미국이 인종을 초월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지만 모든 소수계가 어느 분야에서나 가능성을 추구하도록 믿게 만들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미국 사회는 아직도 흑백 평등을 인종적 정치적 제도적 법적으로 주창하고 있지만 그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건너야 할 강과 넘어야 할 산이 아직은 많다.
서기열 한국경제신문 기자 philos@hankyung.com
에이브러햄 링컨 전 미국 대통령 탄생 200주년인 12일을 맞아 미 전역에서 추모열기가 뜨겁다.
링컨 열기에 불을 댕긴 것은 버락 오바마 44대 대통령이다.
오바마는 링컨이 흑인 노예해방을 선포한 이후 당선된 첫 흑인 미국 대통령이다.
흑인 노예해방을 선포했던 링컨 탄생 200주년에 미 역사상 첫 흑인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했다는 정치적 역사적 인종적 의미가 보태지면서 과거 어느 때보다 주목을 받고 있다.
⊙ 오바마의 링컨식 통합정치 주목
'검은 링컨'으로 불리는 오바마가 링컨식 통합정치를 추구하면서 링컨은 새로운 조명을 받고 있다.
링컨 탄생 200주년위원회 의장인 딕 더빈 상원의원은 8일 "미국의 경제적 도전이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오바마 대통령은 링컨 대통령과 같은 리더십과 용기를 보여줄 것으로 믿는다"고 각별한 시대적 의미를 강조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취임일 직전 링컨처럼 통합열차를 타고 워싱턴에 입성,링컨기념관에서 경축행사를 가졌다.
취임식 때는 링컨이 사용했던 성경에 손을 얹고 취임선서를 했다.
그는 링컨 탄생일 오전엔 워싱턴 링컨기념관에 헌화한 뒤 링컨의 정치적 고향이자 자신의 텃밭인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를 방문했다.
이로써 추모 열기는 절정에 달했다.
미국 로드아일랜드 주대법원장을 지냈던 프랭크 윌리엄은 워싱턴 지역 출신 학생들과 함께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을 낭송했다.
일리노이주를 비롯한 미국 곳곳에서 모인 학생들이 게티스버그 연설을 집단 낭송했다.
1865년 링컨이 저격당한 워싱턴 포드극장은 2007년 5월부터 진행된 보수공사를 마치고 링컨 탄생일에 맞춰 11일 재개관, 16일부터 일반에 공개됐다.
링컨이 1862년 노예해방 선언을 앞두고 5개월 동안 개인적 정치적 역사적인 고민과 결단을 내린 과정을 주제로 다룬 연극도 포드극장 무대에 오른다.
⊙ 링컨이 정치사에 남긴 발자취
링컨은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은 대통령이다.
링컨은 미국인 뿐 아니라 세계인에게 하나의 신화로 비친다.
분열과 혼란을 종식하고 미국을 하나의 통합된 국가로 만들었고 노예해방을 통해 인간의 자유와 인권을 보호한 위대한 지도자로 기억되고 있다.
링컨은 분열 위기에 처한 미국을 남북전쟁이라는 큰 대가를 치르면서 구해낸 영웅이었다.
링컨이 없었더라면 지금 미국은 50개의 작은 나라로 나뉘어 있을 것이란 말도 나온다.
그는 또 노예해방 선언으로 모두에게 자유로운 나라를 만든 위대한 성자(聖者)이자,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통일된 나라를 지켜내고 나서 암살범의 총탄에 희생된 순교자의 이미지도 갖고 있다.
특히 존 부스라는 열렬한 남부지지자 배우가 쏜 총에 맞아 숨진 날이 바로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수난절이어서 순교자적 이미지가 더욱 강하게 남아있다.
미국 역사에서 가장 고통받고 소외됐던 소수계층인 흑인을 처음 대통령으로 받아들인 미국인들이 링컨의 탄생 200주년을 더욱 열광적으로 맞이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미국 시사주간 타임은 최근 "우리가 링컨에 주목하는 것은 인종과 평등에 관한 그의 관점,그리고 남북전쟁에서 발휘한 그의 지도력"이라면서 "지금의 경제 상황을 고려할 때 링컨의 경제관에도 관심을 기울일 만하다"고 평가했다.
링컨은 기회의 평등을 강조했다.
그는 정부가 경제 발전을 위한 기반을 건설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었고,이 모든 것을 위한 기본 원칙이자 국가의 존재 이유가 국민에게 동등한 기회를 주는 것으로 생각했다.
링컨은 경제적 자유가 바로 정치적 자유의 초석이라는 점을 알았다.
그래서 노예경제를 타파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스스로 얻은 빵을 먹을 권리에서 흑인은 나와 더글러스뿐 아니라 모든 사람과 동등하다"고 강조했다.
⊙ 흑백평등 이상과 현실
흑인이 미국 땅에 첫발을 디딘 것은 1619년 이후 노예제도가 시작됐고 흑인들은 백인 정착자들에게 사람이 아닌 물건처럼 분배됐다.
그 뒤 400년 가까이 1200만~1500만명에 달하는 아프리카 흑인들이 노예로 끌려왔다.
이들 흑인 노예에 대한 인종적 사회적 속박과 차별은 처절했다.
흑인 노예는 말을 알아듣는 사유재산에 불과했고 소나 말과 다름없는 취급을 받았다.
흑인 노예가 백인의 아이를 낳더라도 그 아이는 흑인 노예 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흑인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이면 평생 흑인의 멍에와 굴레에서 살아야만 했다.
흑인들의 피와 눈물, 그리고 한이 서린 노예제도는 남북전쟁을 계기로 큰 전기를 맞았다.
링컨 대통령이 1862년 9월 남북전쟁 중에 노예해방을 선언했다.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다음 미 수정헌법 13조를 통해 노예제의 공식적인 종말을 선언했다.
그러나 미국의 흑백 인종차별은 노예제 폐지 선언만으로는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링컨 대통령의 암살이 예고했던 것처럼 흑인에 대한 뿌리깊은 차별과 편견은 그 이후에도 계속됐다.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흑인에 대한 폭력은 끝나지 않았고 미국 대법원에 의해 "서로 다른 인종은 동등하지만 분리될 수 있다"는 판결이 내려져 인종 분리주의가 정당화되기까지 했다.
미 의회가 불과 반세기 전인 1957년 모든 흑인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공민권법을 통과시켰지만,남부 주들은 이 법을 지키지 않았다.
이러한 냉혹한 차별도 흑인들의 자각과 희생에 의해 변화가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다.
흑인들은 올해로 정확히 100년 전인 1909년에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를 설립하면서 인권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했고 1960년대 마틴 루터 킹 목사로 대변되는 흑인인권운동 등을 계기로 흑인들도 정치 참여의 기회를 얻기 시작했다.
이처럼 결코 순탄치 않은 미국 흑인 역사 과정에서 링컨의 노예해방 선언이나 오바마 대통령 당선과 취임은 그 자체가 역사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라이스 전 국무장관은 작년 12월 CNN과의 인터뷰에서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과 관련,"앨라배마 버밍엄에서 차별받으며 자란 경험을 돌이켜보면 참으로 역사적 변화의 순간을 맞았다고 생각한다"고 평가했다.
또 오바마의 대통령 취임을 하루 앞두고 여론조사에서 3분의 2 이상이 흑백 간 인종 평등을 외쳐온 킹 목사의 꿈이 실현됐다는 결과가 나왔다.
CNN 리서치는 지난 1월 1245명(백인 787명,흑인 332명)의 성인남녀를 대상으로 한 전화설문 조사에서 흑인들 가운데 69%가 킹 목사의 꿈이 실현됐다고 답했다며 이는 작년 3월에 나온 34%보다 배 이상 높은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링컨 탄생 200주년에 흑인 최초 대통령 취임이 당장 취업이나 승진 등 현실적인 흑백 인종차별 문제를 해소할 것으로 기대해선 안 된다는 냉정한 평가도 없지 않다.
라이스 전 국무장관은 "오바마 대통령 당선으로 우리가 인종의 색깔을 차별하지 않는 컬러 블라인드가 됐다고 스스로 기만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미국의 흑인 여성인권 운동가인 말리크 미아는 "오바마의 승리는 태도의 변화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뛰어넘는다"며 "오바마의 승리로 미국이 인종을 초월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지만 모든 소수계가 어느 분야에서나 가능성을 추구하도록 믿게 만들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미국 사회는 아직도 흑백 평등을 인종적 정치적 제도적 법적으로 주창하고 있지만 그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건너야 할 강과 넘어야 할 산이 아직은 많다.
서기열 한국경제신문 기자 phil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