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역사가 달빛에 바래면 설화가 된다
"선화 공주님은 맛둥 도련님을 밤에 몰래 안으러 간다네."

백제 무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가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경주에 가서 퍼뜨렸다는 서동요이다.

무왕은 총각 시절 산약초의 하나인 '마'를 캐서 생계를 꾸려 이름이 서동(署童)으로 불렸다.

공주가 서동과 사랑에 빠졌다는 노래를 들은 진평왕은 크게 화가 나 공주를 귀양보내게 되고, 외롭게 귀양길을 떠나는 선화공주를 서동은 기꺼이 아내로 맞게 된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서동요 이야기는 사실이건, 사실이 아니건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왔다.

무왕 당시 신라와 백제의 적대적 관계를 감안하면 사실이 아닐 가능성도 있지만 용감한 왕자와 예쁜 공주의 사랑이야기를 사람들은 믿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최근 전북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서 금제사리기와 함께 발견된 기록에서 무왕의 왕후가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 귀족인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문구가 발견되어 서동요의 사실 여부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의 조사 결과 부처님 사리를 모신 경위를 새겨놓은 사리봉안기(奉安記)에 무왕의 왕후는 백제 좌평 벼슬을 지낸 '사택'의 딸로 적혀 있었다.

'사택'은 백제의 8대 성씨 중 하나로 핵심 귀족이다.

무왕의 왕후가 사택의 딸이라는 문구가 언론에 보도되자 서동의 사랑을 믿고 싶었던 사람들은 크게 실망하고 있고 서동요를 중요한 문화재산으로 생각해왔던 익산 지역은 패닉에 빠진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아직 선화공주의 역사적 진실이 완전히 밝혀졌다고 단정하기는 이르다는 지적도 많다.

우리는 수많은 설화와 신화 속에 살아간다.

단군 신화가 그렇고 이번의 서동요도 그렇다.

서양도 사정은 비슷하다.

설화 관련 유적이 오랜 세월 후에 발견되는 경우는 적지 않다.

예를 들어 트로이 전쟁 설화는 19세기까지만 해도 실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독일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1822~1890)이 터키 서부지역에서 유적지를 발굴함으로써 트로이 도시와 전쟁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동화로 친숙한 온달 설화도 충청북도 단양군에서 온달 장군이 직접 쌓아올린 산성이 발견된 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설화는 오랜 세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어 왔으므로 다양한 사회 계층 사람들의 생각이 담겨 있다.

유적이 없더라도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다.

박주병 연구위원 jbpar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