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사 석탑서 발견된 사리봉안기엔 ‘무왕의 부인은 다른 사람’
백제의 제30대 임금 무왕(武王 · 재위 600~641년)이 왕위에 오르기 전인 젊은 시절, 신라 제26대 진평왕의 셋째딸 선화(善花)공주가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사모하던 끝에 경주에 가서 퍼뜨렸다는 것이 '서동요(薯童謠)'다.
'서동'은 무왕의 어릴 때 이름으로,홀어머니를 모시고 마(薯)를 캐다 팔아 생계를 꾸렸다 해서 사람들이 이렇게 불렀다고 《삼국유사》'무왕 조(條)'는 전한다.
어느날 서동은 선화공주가 '비할 데 없이 아름답다(美艶無雙 · 미염무쌍)'는 이야기를 듣고 경주로 가서 이 노래를 퍼뜨렸고, 대궐 안까지 노래가 퍼지자 진평왕은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보냈다.
선화공주가 귀양지에 이를 즈음 서동이 나타나 사랑을 청했고 둘은 백제로 돌아가 함께 살았으며 서동은 훗날 왕이 됐다.
《삼국유사》는 또 무왕과 '부인'이 사자사(절)에 가다가 용화산 아래 큰 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나자 왕후의 요청으로 못을 메우고 그 자리에 절을 짓고 미륵사라고 이름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러브스토리인가.
하지만 최근 전북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에서 금제사리기(金製舍利器)와 함께 발견된 한 장의 금판은 《삼국유사》가 전하는 서동요 로맨스의 진위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석탑을 만들고 부처님 사리를 모신 경위를 금판에 새겨놓은 사리봉안기(奉安記)가 무왕의 왕후는 (선화공주가 아닌) 백제 고관의 딸이라고 밝혀놓았기 때문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는 지난 1월19일 미륵사지 석탑을 보수하기 위해 해체하던 중 석탑 1층의 심주(心柱) 윗면 중앙에서 사리공을 발견, 금제사리기와 봉안기 등 500여점의 유물을 일괄 수습했다고 발표했다.
사리공 중앙에서 발견된 병 모양의 금제사리호 표면의 다양하고 정교한 문양은 절정에 달한 백제 금속공예의 수준을 과시했다.
백제시대 사리기의 발견 자체가 2007년 부여 왕흥사지 목탑터에서 발굴된 창왕(昌王) 시대(577년) 사리기에 이어 두 번째일 정도로 드문 일인 데다 정교하고 세련된 가공 수법, 각종 공양품이 일괄 출토된 점 등으로 인해 "국보급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국보급 유물"이라고 국립문화재연구소는 평가했다.
하지만 언론과 세간의 관심은 사리기보다 사리봉안기에 쏠렸다.
가로 15.5㎝,세로 10.5㎝ 크기의 금판 양면에 글자를 음각(陰刻)하고 글자마다 붉은 색을 칠한 사리봉안기 앞면에는 1행 9글자씩 모두 11행 99자를,뒷면에는 11행 94글자를 새겼는데, 미륵사와 석탑을 언제 누가 세웠는지 밝혀놓았다.
김상현 동국대 교수가 번역한 바에 따르면 봉안기는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에 좋은 인연(善因)을 심어…깨끗한 재산을 희사하여 절을 세우시고,기해년 정월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라 미륵사 석탑의 창건 연대는 무왕 재위 기간인 639년이며,무왕의 왕후는 백제 최고 관직인 '좌평'을 지낸 사택의 딸이고, 미륵사는 좌평의 딸인 왕후가 재물을 보시하고 창건했음이 밝혀졌다.
좌평 벼슬을 지낸 '사택'은 백제의 8대 성씨 가운데 하나로 노중국 계명대 교수는 "성왕이 사비로 천도할 때 이를 지지했던 핵심 귀족"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사실을 바탕으로 대부분의 언론매체들은 '서동요'를 비롯한 무왕과 선화공주의 로맨스가 허구일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역사학계 일각에서는 일찍부터 《삼국유사》 '무왕 조'의 기사에 대해 신빙성이 없다고 주장해왔다.
무왕은 41년에 이르는 재위 기간에 신라와 빈번히 전쟁을 벌였는데 선화공주가 왕후였다면 그럴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봉안기의 기록만으로 두 사람의 로맨스를 허구로 단정짓기엔 무리라는 의견도 대두되고 있다.
사리봉안기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백제 왕후가 재산을 기부한 일, 이를 토대로 가람(절)을 세운 일, 639년 정월에 사리를 석탑에 안치한 일 세 가지다.
이것만으로는 선화공주가 무왕의 왕후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 없고 미륵사의 창건 시기도 639년으로 확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석탑에 사리를 봉안한 시점과 사찰의 창건 시점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김봉건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언론에서 '서동요' 설화가 허구일 가능성을 너무 단정적으로 부각시켰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서동요' 설화가 거짓이라고 단정하기 매우 어렵다"고 말했다.
무왕의 재위기간이 워낙 길어서 왕후가 여러명일 수도 있고, 미륵사는 중앙과 동 · 서의 세 건물이 합쳐진 '3원1가람(三院一伽藍)' 형식의 사찰이기 때문에 단기간이 아니라 20~30년씩 걸려 지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이유다.
가령 이번에 사리기와 봉안기가 발견된 석탑은 서탑인데 서쪽 가람은 백제 귀족의 딸인 후대 왕후가 짓고 중원은 선대 왕후인 선화공주가 세웠을 수도 있다.
실제로 가운데 있었던 목탑과 동 · 서 석탑은 양식도 다르고 조성 시기도 다르다.
동 · 서탑은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앙과 동 · 서 가람의 조성 연대가 달랐을 가능성도 크다.
《삼국유사》의 기록처럼 선화공주가 미륵사 창건을 발원했으나 수십년이 걸리는 탓에 완공을 보지 못하고 일찍 타계한 뒤 다른 왕후가 서탑을 세웠을 개연성도 충분하다.
이번 발견으로 오히려 《삼국유사》의 정확성이 입증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사리봉안기가 전하는 내용은 무왕 때 미륵사가 건립됐고, 왕후가 미륵사 건립을 주도했으며, 사자사(현재의 사자암) 가는 길 용화산 아래에 미륵사가 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맞아 떨어진다고 김상현 교수는 설명했다.
하지만 이 같은 가정이 모두 사실이 아니라면 어떻게 될까.
한국 가사문학의 대가인 임기중 동국대 교수는 "역사적 사실과 설화적 내용은 분리해서 바라봐야 하므로 어떤 경우에도 '서동요'의 의미는 퇴색될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
설화를 소재로 한 '서동요'의 선화공주 이야기는 사리봉안기 내용과 관계없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얘기다.
종합적으로 판단하자면 이번 미륵사 석탑에서 나온 사리봉안기만으로 무왕과 선화공주의 러브스토리를 의심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오히려 미륵사에 얽힌 이야기가 더 풍성해졌고 기록이 다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 상상력을 발휘할 여지가 더 넓어졌다.
사적지로 지정된 1338만4699㎡(약 404만8870평)에 이르는 백제 최대의 사찰 미륵사에 얼마나 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을지 더욱 궁금하다.
서화동 한국경제신문 기자 fireboy@hankyung.com
백제의 제30대 임금 무왕(武王 · 재위 600~641년)이 왕위에 오르기 전인 젊은 시절, 신라 제26대 진평왕의 셋째딸 선화(善花)공주가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사모하던 끝에 경주에 가서 퍼뜨렸다는 것이 '서동요(薯童謠)'다.
'서동'은 무왕의 어릴 때 이름으로,홀어머니를 모시고 마(薯)를 캐다 팔아 생계를 꾸렸다 해서 사람들이 이렇게 불렀다고 《삼국유사》'무왕 조(條)'는 전한다.
어느날 서동은 선화공주가 '비할 데 없이 아름답다(美艶無雙 · 미염무쌍)'는 이야기를 듣고 경주로 가서 이 노래를 퍼뜨렸고, 대궐 안까지 노래가 퍼지자 진평왕은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보냈다.
선화공주가 귀양지에 이를 즈음 서동이 나타나 사랑을 청했고 둘은 백제로 돌아가 함께 살았으며 서동은 훗날 왕이 됐다.
《삼국유사》는 또 무왕과 '부인'이 사자사(절)에 가다가 용화산 아래 큰 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나자 왕후의 요청으로 못을 메우고 그 자리에 절을 짓고 미륵사라고 이름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러브스토리인가.
하지만 최근 전북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에서 금제사리기(金製舍利器)와 함께 발견된 한 장의 금판은 《삼국유사》가 전하는 서동요 로맨스의 진위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석탑을 만들고 부처님 사리를 모신 경위를 금판에 새겨놓은 사리봉안기(奉安記)가 무왕의 왕후는 (선화공주가 아닌) 백제 고관의 딸이라고 밝혀놓았기 때문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는 지난 1월19일 미륵사지 석탑을 보수하기 위해 해체하던 중 석탑 1층의 심주(心柱) 윗면 중앙에서 사리공을 발견, 금제사리기와 봉안기 등 500여점의 유물을 일괄 수습했다고 발표했다.
사리공 중앙에서 발견된 병 모양의 금제사리호 표면의 다양하고 정교한 문양은 절정에 달한 백제 금속공예의 수준을 과시했다.
백제시대 사리기의 발견 자체가 2007년 부여 왕흥사지 목탑터에서 발굴된 창왕(昌王) 시대(577년) 사리기에 이어 두 번째일 정도로 드문 일인 데다 정교하고 세련된 가공 수법, 각종 공양품이 일괄 출토된 점 등으로 인해 "국보급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국보급 유물"이라고 국립문화재연구소는 평가했다.
하지만 언론과 세간의 관심은 사리기보다 사리봉안기에 쏠렸다.
가로 15.5㎝,세로 10.5㎝ 크기의 금판 양면에 글자를 음각(陰刻)하고 글자마다 붉은 색을 칠한 사리봉안기 앞면에는 1행 9글자씩 모두 11행 99자를,뒷면에는 11행 94글자를 새겼는데, 미륵사와 석탑을 언제 누가 세웠는지 밝혀놓았다.
김상현 동국대 교수가 번역한 바에 따르면 봉안기는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에 좋은 인연(善因)을 심어…깨끗한 재산을 희사하여 절을 세우시고,기해년 정월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라 미륵사 석탑의 창건 연대는 무왕 재위 기간인 639년이며,무왕의 왕후는 백제 최고 관직인 '좌평'을 지낸 사택의 딸이고, 미륵사는 좌평의 딸인 왕후가 재물을 보시하고 창건했음이 밝혀졌다.
좌평 벼슬을 지낸 '사택'은 백제의 8대 성씨 가운데 하나로 노중국 계명대 교수는 "성왕이 사비로 천도할 때 이를 지지했던 핵심 귀족"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사실을 바탕으로 대부분의 언론매체들은 '서동요'를 비롯한 무왕과 선화공주의 로맨스가 허구일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역사학계 일각에서는 일찍부터 《삼국유사》 '무왕 조'의 기사에 대해 신빙성이 없다고 주장해왔다.
무왕은 41년에 이르는 재위 기간에 신라와 빈번히 전쟁을 벌였는데 선화공주가 왕후였다면 그럴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봉안기의 기록만으로 두 사람의 로맨스를 허구로 단정짓기엔 무리라는 의견도 대두되고 있다.
사리봉안기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백제 왕후가 재산을 기부한 일, 이를 토대로 가람(절)을 세운 일, 639년 정월에 사리를 석탑에 안치한 일 세 가지다.
이것만으로는 선화공주가 무왕의 왕후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 없고 미륵사의 창건 시기도 639년으로 확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석탑에 사리를 봉안한 시점과 사찰의 창건 시점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김봉건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언론에서 '서동요' 설화가 허구일 가능성을 너무 단정적으로 부각시켰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서동요' 설화가 거짓이라고 단정하기 매우 어렵다"고 말했다.
무왕의 재위기간이 워낙 길어서 왕후가 여러명일 수도 있고, 미륵사는 중앙과 동 · 서의 세 건물이 합쳐진 '3원1가람(三院一伽藍)' 형식의 사찰이기 때문에 단기간이 아니라 20~30년씩 걸려 지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이유다.
가령 이번에 사리기와 봉안기가 발견된 석탑은 서탑인데 서쪽 가람은 백제 귀족의 딸인 후대 왕후가 짓고 중원은 선대 왕후인 선화공주가 세웠을 수도 있다.
실제로 가운데 있었던 목탑과 동 · 서 석탑은 양식도 다르고 조성 시기도 다르다.
동 · 서탑은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앙과 동 · 서 가람의 조성 연대가 달랐을 가능성도 크다.
《삼국유사》의 기록처럼 선화공주가 미륵사 창건을 발원했으나 수십년이 걸리는 탓에 완공을 보지 못하고 일찍 타계한 뒤 다른 왕후가 서탑을 세웠을 개연성도 충분하다.
이번 발견으로 오히려 《삼국유사》의 정확성이 입증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사리봉안기가 전하는 내용은 무왕 때 미륵사가 건립됐고, 왕후가 미륵사 건립을 주도했으며, 사자사(현재의 사자암) 가는 길 용화산 아래에 미륵사가 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맞아 떨어진다고 김상현 교수는 설명했다.
하지만 이 같은 가정이 모두 사실이 아니라면 어떻게 될까.
한국 가사문학의 대가인 임기중 동국대 교수는 "역사적 사실과 설화적 내용은 분리해서 바라봐야 하므로 어떤 경우에도 '서동요'의 의미는 퇴색될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
설화를 소재로 한 '서동요'의 선화공주 이야기는 사리봉안기 내용과 관계없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얘기다.
종합적으로 판단하자면 이번 미륵사 석탑에서 나온 사리봉안기만으로 무왕과 선화공주의 러브스토리를 의심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오히려 미륵사에 얽힌 이야기가 더 풍성해졌고 기록이 다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 상상력을 발휘할 여지가 더 넓어졌다.
사적지로 지정된 1338만4699㎡(약 404만8870평)에 이르는 백제 최대의 사찰 미륵사에 얼마나 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을지 더욱 궁금하다.
서화동 한국경제신문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