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포퓰리즘이 낳은 법은 재앙을 부른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경제철학자 중 한 사람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von Hayek·1899~1992)는 경쟁을 자유시장 경제의 작동원리로 보는 대표적인 시장 경제주의자이다.

그는 대표작 ‘노예의 길’(The Road to Serfdom·나남출판간)에서 법률가들이 이야기하는 사회적 정의가 얼마나 모순적인지 얘기하면서 진정한 법의 지배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다.

‘노예의 길’에서 ‘법의 지배’와 관련한 내용을 발췌해 소개한다.

다소 어렵지만 끝까지 읽어보자.

이 글에서 하이에크는 입법 기능의 과잉에 대해 걱정하고 포퓰리즘을 경계하며 국회가 왜 포퓰리즘에 포획되는지를 분석한다.

최근 우리나라 국회의 파행상을 생각하면 의외로 쉽게 읽혀진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그의 저서 ‘노예의 길’서 경고

"민주주의는 완벽한 독재조차 합법적 제도로 만들어"

의회가 포괄적 경제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는 것이 만장일치로 드러난 국민들의 뜻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선언한다고 해서 국민이든 국민의 대표들이든 특정 계획에 대해 반드시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민주적 의회들이 국민들의 분명한 위임사항으로 간주되는 것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면 이는 필연적으로 민주적 제도들에 대한 불만을 야기할 것이다.

국회는 맡겨진 일을 하라고 뽑혔으나 이를 수행할 수 없거나 무능하고 비능률적인 말만 무성한 곳으로 간주될 것이다.

(중략)

[Cover Story] 포퓰리즘이 낳은 법은 재앙을 부른다
문제의 본질은 오히려 의원이나 의회에 주어진 과업 자체에 내재된 모순이 있다.

의회 의원들이 요청받은 일은 그동안 동의할 수 있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에 대한 동의-즉 국가 자원의 전체적 통제에 대한 합의-를 만들어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다수결 체제는 적합하지 않다.

사람들은 계획의 위임은 보통 그 임무의 기술적 성격에 따라 정당화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기술적 세부 사항만이 위임된다는 의미가 아니며 혹은 더 나아가 의회가 기술적 세부사항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어려움의 근본원인이라는 의미도 아니다.

중요한 사실은 입법이 진정한 다수결의 합의가 성취될 수있는 일반적 규칙의 범위를 넘어서지 않았던 반면 경제활동의 계획에서는 화해돼야 할 이해관계들이 너무나 다양해서 민주적 의회에서 진정한 합의에 도달할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이른바 민주주의의 무능의 근본원인이 권한 위임이라는 수단을 사용한다고 해서 제거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제5장 계획과 민주주의)

법의 지배는 자유시대 동안에만 의식적으로 진화했으며,이것은 자유의 안전판으로서 뿐만 아니라 자유의 법적 구체화로서 자유시대의 가장 위대한 업적들 가운데 하나이다.

임마누엘 칸트가 말했듯이 "그 어떤 다른 사람도 따를 필요가 없고 단지 법만 따르면 될 때 우리는 자유롭다".

그러나 법의 지배의 이상은 명확하지 않은 형태이기는 했지만 적어도 로마시대 이후 존재했으며,지난 수세기 동안 법의 지배는 지금처럼 심각한 위협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입법자들의 권한에는 한계가 없다는 생각은 부분적으로는 대중적 주권과 민주주의 정부의 결과이다.

국가의 모든 행동이 입법에 의해 정당하게 권위를 인정받기만 한다면 법의 지배 이상은 보존된다는 믿음에 의해 이런 무한 입법권 사상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이는 법의 지배 의미를 완전히 잘못 이해한 것이다.

완전히 합법적이라고 해서 법의 지배 규칙을 따르는 것은 아니다.

히틀러가 그의 무한정의 권력을 완전히 합헌적 방식으로 획득했고 그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법률상의 의미로 볼 때는 합법적일 수 있다.

그러나 누가 이런 이유로 나치 독일에 아직도 법의 지배가 유지되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계획된 사회주의 사회에는 법의 지배가 유지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정부의 강제력 사용이 더 이상 미리 확립된 규칙들에 의해 제약받지 않는다는 의미일 뿐이다.

법은 모든 의도들과 목적들에 따라 이루어진 모든 자의적 행동을 합법화할 수 있다.

사실 경제활동의 중앙 명령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합법화해야 한다.

만약 법률이 중앙계획위원회나 당국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고 정하면,그 위원회나 당국이 하는 것은 합법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위원회나 당국의 행동들은 확실히 법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은 아니다.

정부에 무한정의 권력을 부여함으로써 가장 자의적인 규칙도 합법화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민주주의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독재조차 합법적 제도로 만들 수 있다.

존 로크가 이미 분명하게 만들었던 것처럼 법 없이는 자유도 있을 수 없다.

진정한 갈등은 서로 다른 종류의 법 사이의 갈등이다.

만약 법이 당국이 경제활동을 지시할 수 있도록 하려면 미리 예측할 수 없는 상황들이 일어날 때,그리고 일반적 형태로 언명될 수 없는 원칙들에 따라 결정하고,이 결정들을 강제할 수 있는 힘을 당국에 부여하여야만 한다.

그 결과 입법권을 위임하는 것이 점점 더 흔한 일이 될 것이다.

법의 지배는 그래서 입법의 범위에 대한 한계를 시사한다.

법의 지배는 입법의 범위를 형식적 법으로 알려진 것과 같은 종류의 일반적 규칙들로 제한하며,특정한 사람들을 직접 목표로 둔 입법이나 혹은 누구든 그와 같은 차별을 위한 목적으로 국가의 강제적 권력을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입법을 배제한다.

법의 지배는 모든 것이 법에 의해 규제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반대로 국가의 강제력이 미리 법에 의해 정의된 경우에 한해서 사용할 수 있고,그 강제력이 어떤 방식으로 사용될 것인지 미리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좀 어려웠나요.

우리나라 국회는 다수결원리조차 반대하고 있으니 위에서 논하고 있는 문제들은 어찌 보면 사치스런 주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소수 의견을 존중하되 합의되지 않을 경우 다수결에 따른다는 것이 모든 민주적 의사결정의 보편적 방법인데 합의에 불성실한 여당도 그렇고 야당은 자신이 반대한다고 표결 자체를 거부하고 있으니 정말 큰 일입니다.

입법부에 어떻게 문제가 발생하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데는 위의 글을 끝까지 읽어내는 인내력도 필요합니다.

쉽게 이해되지 않으면 몇 번 더 읽어 보세요.

오춘호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ohch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