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침체 따른 사회불안…무능한 정부에 반기
[Global Issue] 그리스 시위, 대안 없는 폭력에 빠져든 젊은이들의 절망
그리스가 반정부 시위로 사실상 국가 기능 마비 상태에 빠졌다.

지난 6일 알렉산드로스 그리고로풀로스라는 15세 소년이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하며 촉발된 폭력시위 사태는 그리스 전역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로 번지며 2주 넘게 지속되고 있다.

수도 아테네와 테살로니키 등 대도시 10여곳에서 청년층을 중심으로 한 수만명의 시민들이 우파 집권당인 신민주당의 콘스탄티누스 카라만리스 총리 퇴진을 요구하며 도로와 학교시설을 점거하고 상점을 부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여 통제 불능 상황이다.

16일엔 반정부 시위대 학생 20여명이 국영 TV방송국에 들어가 진행 중이던 뉴스 방송을 일시 중단시키는 등 혼란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이들은 카라만리스 총리의 연설이 진행 중이던 뉴스 프로그램을 중단시키고 "시청을 중단하고 거리로 나가라" "체포된 모든 사람을 석방하라"는 내용의 현수막을 1분여간 시청자들에게 방영했다.

며칠간 비교적 소강상태를 보였던 반정부 시위는 이날 시위 11일째를 맞아 아테네 테살로니키 등 주요 도시에서 다시 격화됐다.

시위대는 현 신민주당(ND) 정부 퇴진과 함께 무장경찰 철수,수감자 석방,사회적 불평등 시정 등을 요구했다.

그리스 교육부는 열흘 넘게 계속된 시위로 100여개 중고교에서 수업이 중단되고 있으며,전국적으로 수십개 대학이 시위대에 점거된 상태라고 밝혔다.

시위가 장기화하면서 현장에서 체포된 시위대 수는 300명으로 늘어났다.

최대 도시인 아테네는 폭력시위로 인해 현재 도시 기능이 마비된 상태다.

국회의사당이 있는 신타그마 광장엔 연일 1만여명의 시위대가 몰려 철야 집회를 벌이고 있다.

아테네 최대 규모인 코이르달로스 교도소 건물 앞에서 수백명의 시위대가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경찰과 대치했고, 도심 주요 도로들도 시위로 차단됐다.

특히 소년을 사살한 혐의로 체포된 경찰관 2명이 "방어를 위한 경고 사격을 가했을 뿐"이라고 증언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시위가 더욱 격화됐다.

또 상점 350여곳과 은행 200여곳이 파괴되는 등 재산 피해도 잇따랐다.

그리스 상공인협회는 이번 시위로 아테네에서만 약 2억유로(약 3570억원)의 손실이 발생했다고 밝혔으며 그 규모는 계속 확대되고 있다.

지난 10일엔 그리스의 양대 노조인 일반노동자연맹(GSEE)과 공공노조최고협의회(ADEDY)가 24시간 전면 파업을 실시하면서 아테네 국제공항의 항공기 결항이 속출하고, 아테네 시내 은행과 학교,병원이 문을 닫기도 했다.

좌파 계열인 사회당 등 야당들도 카라만리스 총리의 사퇴와 조기 총선 실시를 요구하고 나섰다.

게오르그 파판드레우 사회당 대표는 "10대 소년에게 경찰이 총격을 가한 것은 전형적인 국가 폭력"이라며 "국민의 신뢰를 잃을대로 잃은 현 정부엔 위기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고 주장했다.

'신화의 나라''서양 문명의 발상지'의 이미지로 대표되는 그리스에서 벌어진 이번 사태는 수십년간 누적된 극심한 빈부 격차와 높은 청년실업률, 후진적인 정치체제와 정부 부패 등 그리스의 숨겨진 치부를 한꺼번에 드러내며 세계인에게 충격을 안기고 있다.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벌어지게 된 가장 큰 요인은 그리스 젊은이들의 사회에 대한 높은 불만이다.

그리스 청년들은 수준 높은 고등교육의 기회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일자리도 구할 수 없다는 데 깊은 절망감을 안고 있다.

그리스의 고등교육 예산은 학생당 연간 5000유로(약 900만원)로, 유로존(유로화 사용 15개국)에서 가장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다.

또 그리스 헌법상 사립대학의 설립이 금지돼 있어 고등교육기관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 대입을 희망하는 학생 중 3분의 1만이 대학에 갈 수 있는 상황이다.

카라만리스 총리 정부는 2년 전 사립대학 설립을 허가하는 내용의 개헌을 추진했지만 교수들과 대학생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쳐 무산된 바 있다.

야니스 스토나라스 아테네대 교수는 "그리스의 장기적 문제는 재정적자가 아니라 교육"이라고 밝혔다.

경기 침체로 인한 사회 불안도 시위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반정부 시위를 주도하고 있는 학생들은 일자리가 없어 불만이 커진 상황이다.

경기 침체가 현실화되기 시작한 9월 그리스의 실업률은 7.4%로 전달보다 0.3%포인트 높아졌다.

2004년 1월 사상 최고치(11.7%)를 기록한 뒤 하락세를 보였던 실업률이 다시 상승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15~24세의 실업률은 9월 무려 24.3%로, 25~34세 계층(10%)보다 두 배 이상 높았다.

일자리를 늘리는 게 급선무지만 글로벌 경기 침체로 여행객이 급감하면서 관광산업 의존도가 큰 그리스로선 직격탄을 맞고 있다.

관광 수입은 그리스 국내총생산(GDP)의 15%, 고용의 16%를 차지한다.

그리스에선 최근 물가가 1990년대 초반 이후 20% 이상 오른 상태여서 외국인 여행자로선 큰 매력을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지난해 1600만명의 외국인이 그리스를 다녀갔지만, 올해는 미국인과 유럽인 관광객이 지난해보다 각각 30%, 6% 줄어 타격이 크다.

내년 전망도 그리 밝지 않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을 치르며 지난해까지 연평균 4%대 성장률을 보였던 그리스는 올해 성장률이 3.1%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내년엔 2.5%까지 하락할 것으로 유럽집행위원회(EC)는 전망했다.

여당인 신민주당의 카라만리스 정부의 도덕성 문제도 도마에 올랐다.

2004년 3월부터 집권해 온 카라만리스 총리는 지난 1월 문화부 최고 권력기관인 중앙고고학위원회의 크리스토스 자코폴로스 위원장의 섹스 및 부패 스캔들로 곤욕을 치렀다.

최근에는 카라만리스 총리의 최측근 중 한 명이자 전직 내무장관인 야니스 케팔로야니스 총리 고문이 범인 은닉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정부가 그리스정교회 사원과 부적절한 부동산 거래로 부당 이익을 취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후진적인 정치 체제와 아직 제대로 정착되지 못한 민주주의 질서도 그리스의 혼란을 부추기는 요인이다.

그리스의 현대사는 2차대전 시절 나치의 점령과 종전 직후 좌·우익 간에 벌어진 치열한 내전, 1967년 게오르기오스 파파도풀로스 장군의 쿠데타 이후 7년간 이어진 군부독재와 그에 대한 저항 등 고난의 역사로 점철돼 있다.

특히 그리스 정계의 양대 명문인 카라만리스가와 파판드레우가의 반세기 넘는 권력 다툼은 그리스의 독재에 가까운 족벌 정치체제의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이 때문에 그리스 국민은 정부와 공권력에 대해 매우 뿌리 깊은 불신을 갖고 있으며, 청년들 사이에선 사회체제에 대한 저항이 순교자적 행위로 떠받들어진다.

이번 시위의 구심점이 된 아테네공대의 경우 1973년 11월 군부독재에 맞선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던 곳으로 그리스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다.

이 사건 후 그리스 정부는 대학 건물 내에 공권력을 투입시키지 못하도록 헌법을 개정했다.

하지만 일각에선 이런 조치가 결국 이번 폭력시위와 같은 파란을 몰고 왔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12일 그리스 시위에 대해 "그리스 청년들은 뚜렷한 목적도 대안도 없이 남아도는 힘을 억제하지 못하며 남성호르몬을 발산하기 위해 줄다리기를 하는 것 같다"며 "민주주의 가치와 질서가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한 사회에서 벌어지는 시위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주장했다.

서기열 한국경제신문 기자 phil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