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대학살의 희생양 아픔 딛고 미국 주류 산업 완전 장악
[Cover Story] 유대인, 굴곡진 역사가 그들을 강하게 키웠다
성경에 따르면 고대 이스라엘인은 아브라함의 후예다.

아브라함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큰 아들이 이스마엘, 작은 아들이 이삭이다.

전설에 따르면 큰 아들인 이스마엘이 아랍인의 조상이며, 이삭이 유대인의 조상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아랍과 이스라엘의 분쟁은 형제 간 싸움이 된다.

어떻든 유대인은 가나안 땅에서 사울을 초대 왕으로 고대 히브리 왕국을 세웠다.

2대 다윗왕은 예루살렘을 정복해 수도로 삼았다.

그의 아들 3대 솔로몬왕이 예루살렘에 유대교 성전을 건축하였지만 솔로몬 사후에 반란이 일어나면서 분열을 거듭했다.

이후 로마 치하에서 유대인들은 대다수가 노예로 팔려가거나 로마 시민으로 동화되었다.

이렇게 뿔뿔이 흩어진 것을 두고 디아스포라(Diaspora)라고 한다.

중세 때는 기독교인들로부터 박해를 면치 못했다.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이 예수를 죽인 민족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고,직업 선택과 거주에 대한 제한을 두었다.

일반 직업에 종사할 수 없게 된 유대인들은 기독교가 인정하지 않던 직업인 금융업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

시민혁명과 함께 시민계급이 역사의 주역으로 부상하면서 유대인들도 사회의 중산층으로 차츰 자리잡게 됐다.

더욱이 독일 등 일부 국가에서는 유대인을 새로운 시민사회에 통합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여전히 그들의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았고 별도의 사회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 홀로코스트와 시오니즘

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33년에는 독일 인구 가운데 약 3%가 유대인이었음에도 그들이 독일 경제에서 차지한 비중은 무려 40%나 됐다.

특히 금융권은 거의 유대인이 쥐고 있었다.

독일인들의 유대인에 대한 반감은 갈수록 증폭됐다.

이 때 정권을 잡은 히틀러는 이러한 대중심리를 이용해 유대인을 축출할 것을 주장했다.

나치정권에 의해 학살당한 사람은 무려 600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물론 이 숫자에 대해서는 논란도 많다)

'유대인의 역사'를 쓴 폴 존슨은 이를 두고 "2000년에 걸친 반(反)유대주의적 증오, 즉 이방인들이나 기독교와 세속인들, 성직자들, 평민들,그리고 대학에서의 증오는 히틀러에 의해 하나의 거대한 괴물로 합쳐져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난 파괴력을 발휘했다"고 적고 있다.

결국 유대인들은 안전한 주거지를 확보하기 위해 항구적이고 독립적이며 무엇보다 자주적인 피난처를 필요로 했고 이러한 자각은 그들의 고향인 시온(Zion)으로 돌아가자는 슬로건으로 모아졌고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을 이끄는 동인이 됐다.

금융재벌인 로스차일드가 이스라엘 건국 자금을 댔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자신들의 조상이 하느님으로부터 약속받은 성지(聖地)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 조국을 세워야만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끝난다고 믿는 시오니즘은 원래 1887년 오스트리아의 테오도르 헤르첼이 스위스 바젤에서 시오니스트 대회를 개최한 것이 계기가 돼 정치운동화된 것이다.

그러던 중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영국은 당시 중동에서의 영국군 작전기지 역할을 맡고 있던 팔레스타인 땅을 아랍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밸푸어 선언'을 발표하고,전후(戰後)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조국을 건설토록하겠다는 약속을 내놓았다.

유대인에 대한 대학살이 이루어지자 시오니즘 운동은 급속히 발전했다.

팔레스타인으로 향하는 유대인의 이민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7만명 정도였던 유대인 인구는 이주민의 유입으로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는 약 40만명으로 늘어났으며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 벤 구리온의 지도 하에 이스라엘을 건국하게 됐다.

오춘호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ohch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