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리스크를 사고 파는 파생 금융시장
국내 굴지의 반도체 장비업체인 태산LCD가 흑자 도산 위기에 처해 있다.

반도체 장비를 판매해 수백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렸지만 키코(KIKO)라는 파생금융상품에 투자했다가 1000억원 이상의 손실을 입었다.

환율이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큰 손실을 입었던 것이다.

태산LCD처럼 환율 예상을 잘못해 손실을 입은 회사는 국내에서 무려 60여개사에 달한다.

대부분 기업들은 환율이 달러당 900원, 890원 등으로 점차 내려갈 것으로 보았으나 세계 금융위기의 여파로 오히려 1000원 이상으로 치솟으면서 대규모 손실을 보게 된 것이다.

기업들은 생산 판매 활동을 하면서 항상 가격 변동 위험에 노출된다.

국제적인 활동을 하는 기업들은 더욱 그렇다.

외국과 무역을 할 경우 환율 변동은 가장 기본적인 위험이다.

석유 등 원자재와 부품 등의 가격도 계속 변한다.

따라서 기업들은 가격 변동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 끓임없이 노력한다.

파생상품은 원래 가격 변동 위험을 피할 수 있도록 고안된 상품이다.

하지만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들 상품이 오히려 위험을 더 키우는 역설적인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투기는 善과 惡의 양면성 있어 위험관리 소홀하면 대형 사태

⊙ 농경 사회의 선도거래

[Cover Story] 리스크를 사고 파는 파생 금융시장
가격 변화 위험을 줄이기 위한 노력은 농경사회에서부터 있었다.

밀을 재배하는 농부와 제과업자가 매년 가을 밀을 사고 파는 거래를 한다고 치자.

만일 어느해 흉년이 나거나 풍년이 들면 밀 가격이 급등하거나 급락할 것이다.

매년 농사를 지어야 하고 빵을 만들어야 하는 농부와 제과업자는 밀 가격이 일정한 수준에서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것을 가장 원한다.

그래야 농삿일이나 제빵 계획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농부와 제과업자는 농사를 시작하는 봄에 미리 밀의 가격을 정하고 계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처럼 특정한 상품을 미래 일정 시점에 미리 정한 가격으로 매매할 것을 약정하는 계약을 선물(선도)거래라고 한다.

이렇게 하면 농부나 제과업자 모두 가격 변동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유럽에서는 12세기 중반 '레트르 드 페르'(상품 판매의 선물 인도를 약속하는 계약)라는 선물거래가 유행했다고 한다.

일본에서도 16세기 봉건 영주들이 나쁜 날씨나 전쟁 위험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쵸아이마이'라는 선물거래를 활용해 쌀을 매매했다.

⊙ 투기 거래의 역할

안정된 거래를 원하는 농부 제과업자와 달리 밀가격이 오를 것으로 예상하고 봄에 미리 밀을 매입하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가격 상승을 예상하고 미리 밀을 매입하는 거래가 투기거래다.

투기거래는 농부와 제과업자 간의 거래를 보완해 주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봄에 미리 밀을 매매하려는 제과업자가 많지 않다면 투기 거래자가 밀을 매입해 뒀다가 가을에 제과업자에게 판매함으로써 농부와 제과업자는 보다 안정적으로 밀과 빵을 생산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부정적 의미의 투기 거래와 달리 선물시장의 투기거래는 이처럼 농부와 제과업자 간의 헤지(가격 안정) 거래를 지원하는 역할을 한다.

투기거래자는 선물거래소가 생기면서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외환 금 석유 등을 거래하는 상품선물거래소는 1865년 시카고에 세계 처음 설립되었다.

일정 가격에 상품을 사고 팔 수 있는 권리를 매매하는 거래인 옵션도 1973년 시카고에서 개설되었다.

선물과 옵션은 수학 통계학, 그리고 전자계산기의 발달로 급속히 성장했다.

특히 피셔 블랙 하버드대 교수, 마이런 숄스 MIT 교수, 로버트 머튼 컬럼비아대 교수 등 3명은 선물 옵션 이론을 체계화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이들 중 숄즈와 머튼 교수는 1998년 자신들이 만든 이론을 실천하는 헤지펀드를 만들었다가 큰 손실을 보게 된다.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진 꼴이 됐다.

⊙ 위험을 계산하는 선물 옵션 거래

투기 거래는 가격 변동 위험을 떠안기 때문에 가격이 자신의 예상과 반대로 움직일 경우 큰 손실을 볼 수 있다.

선물거래소가 등장한 이후 많은 금융회사들은 이러한 파생금융상품의 위험을 피하지 못해 파산했다.

1990년대 말 영국의 베어링 증권은 홍콩지점의 한 직원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위험이 있는 선물에 투자했다가 큰 손실을 입어 결국 회사 문을 닫아야 했다.

최근 미국에서 파산 위기에 몰린 대형 투자은행들은 담보로 잡은 주택 채권이 부실화할 경우 회사에 미치는 손실 규모를 예상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파생상품이 큰 피해를 가져 오는 것은 이익과 손실이 투자 규모의 수배에 달하도록 설계된 지렛대(레버리지) 효과 때문이다.

레버리지는 남의 돈을 빌려 투자하는 것을 말한다.

또는 소액의 계약금만 걸고 거래를 하기 때문에 투자결과도 크게 증폭된다.

예를 들어 1억원짜리 상품이 있어도 실제 계약은 1000만원만 걸고 매매를 할 수 있다.

이때 가격이 10% 올라 1100만원이 되면 이 투자자는 계약금을 걸고 사두었던 상품을 팔아 100%의 이익을 얻게 된다.

영국의 유명한 경제칼럼니스트 제임스 모건은 "파생 상품은 면도날과 같다. 당신은 면도를 하기 위해 그것을 사용할 수도 있고 자살을 하기 위해 그것을 사용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세계 각국은 파생금융상품이 자칫 자살용으로 이용되지 않도록 금융회사들을 감독하고 있다.

국제기구는 금융회사 위험 관리에 대한 규정을 만들어 세계 각국에 지키도록 권고하고 있지만 한번씩 이번과 같은 대형 사태가 터지기도 하는 것이다.

박주병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jbpar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