튤립·철도 등에도 한 때 투기 광풍

거품 일시에 꺼져 큰 후유증 앓아
[Cover Story] 자본주의는 투기와 함께 성장했다
"인생은 투기이고 투기는 인간과 함께 탄생했다." (미국의 유명한 상인 케네)

자본주의 역사는 투기와 함께 성장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탕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은 그 무엇을 대상으로 해서건 투기적 거품을 계속 만들어왔다.

투기는 때로 경제성장을 촉진하기도 했고 때로는 자본주의를 곪게 하는 독약이 돼왔던 것도 사실이다.

투기에 병든 국가는 한때 곤란을 겪었으나 그 투기로 인해 미래의 먹거리가 생기기도 했다.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는 "투기는 인간 대다수가 그들 자신의 능력에 대해 갖고 있는 오만한 자부심과 그들 자신의 운에 대한 터무니없는 신뢰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역사에서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투기 사례들을 소개한다.

⊙ 네덜란드 튤립 투기

1630년대 네덜란드는 아주 부유한 국가였다.

당시 유럽국가 가운데 1인당 국민소득이 가장 높았던 네덜란드인들은 앞다퉈 교외에 대저택을 짓는 등 호황을 만끽했다.

부동산 가격도 급상승했다.

풍요와 오만에 젖은 네덜란드 인들은 잘산다는 과시욕을 드러냈고 더 큰 부를 안겨줄 대상을 찾기 시작했는데 그 대상이 바로 터키에서 수입돼 부자들의 정원을 장식하기 시작한 튤립이었다.

튤립은 꽃의 색깔에 따라 등급이 매겨졌는데 꽃이 만개할 때까지 무늬와 색깔을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는 점이 튤립 투기의 본질이었다.

더욱이 돌연변이로 탄생한 황제튤립의 뿌리는 호사가들의 입맛을 당겼다.

이 튤립 뿌리는 겨울에 판매되지 않았기 때문이 미리 이 뿌리를 구매해 두려는 사람들이 몰리면서 튤립 선물거래가 시작됐다.

튤립 선물을 미리 산 사람은 미래의 일정시점에 튤립의 뿌리를 전달받기로 하고 미리 계약을 체결했다.

구매자들은 이 권리를 되팔면서 차익을 남겼다.

이 권리가 몇 차례 값이 오르며 팔리자 봄철 뿌리가 나오기도 전에 이미 뿌리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르게 된 것이다.

평범한 튤립 뿌리가 20배 이상 뛰어 올랐다.

그러나 거품은 한순간이었으며 봄이 다가오자 갑자기 튤립값은 대폭락했다.

네덜란드 정부가 나섰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나 이 거품 시기에 발달한 화훼 기술은 네덜란드가 아직까지 화훼 산업의 강국으로 군림하는 데 도움을 줬다.

⊙ 영국의 철도 투기

과학혁명으로 인해 나온 새 상품들은 투기꾼에게는 아주 좋은 먹잇감이었다.

1690년대 잠수구와 내연기관, 유치한 수준의 경보기,1720년대 기관총과 영구회전 바퀴가 투기 바람을 탔다.

그러나 무엇보다 1825년 선보인 증기기관차는 과학기술의 산물이 투기와 맞닥뜨린 대표적인 사례다.

철도의 발명은 전례없는 혁명적인 진보라고 영국의 언론들은 떠들어댔다.

철도가 끼친 영향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영국의 지역 갈등은 해소되고 권력이 분산되며 정보는 늘어나고 대영제국이 건설될 것으로 사람들은 생각했다.

철도회사 주식은 어떤 공황에도 안전할 것이라고 믿었다.

당시 영국 경제는 금리가 낮았고 곡물 값이 쌌다.

유동자금도 풍부했다.

많은 투자자들이 철도에 투자했다.

철도 회사들의 당기 순이익은 빠르게 상승했고 철도혁명에 대한 관심은 나날이 증폭되고 있었다.

철도 레일을 대량 매점한 자도 나왔으며 신설 회사 발기인들은 철도신문 친구를 동원해 허위과장 기사를 내보내 투자자들을 현혹했다.

정부의 새로운 철도건설 계획은 철도국의 공식적인 발표가 있기 전 시장에 유포됐으며 철도국 직원과 신청기업 간 부당 내부거래 의혹이 일기도 했다.

철도기업들은 앞다퉈 기존 철도길이보다 4배나 긴 철도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실제로 철도 건설에 들어가자 철도회사들은 들어오지 않는 주식대금을 투자자들에게 청구하기 시작했고 투기꾼들은 보유 주식을 내다팔면서 주가는 급락했다.

이자율도 인상되면서 하루아침에 버블은 꺼졌다.

결국 교도소는 철도회사 발기인들로 가득찼고 거리와 공원 벤치는 파산한 투기꾼들로 득실거렸다.

철도 투기가 전 경제에 미친 영향이 정상화되기까지 2년 이상이나 걸렸다.

그러나 영국은 철도건설이 빨리 추진되면서 대량수송 수단으로 산업혁명에 엄청난 기여를 했다.

⊙ 1929년 미국의 대공황

1920년대 미국은 전례없는 호황을 구가했다.

부동산 값이 지속적으로 올랐으며 금리도 안정상태를 유지했다.

일반인들은 주식에 매달렸다.

일반인들은 주식의 미래 가치를 계산하기 위해 수학에 매달렸다.

사람들은 수학이 정확하고 믿을 만한 답을 도출해낸다고 확신했다.

1925년 이자율 인하는 증시호황을 더욱 촉발시켰다.

돈을 빌려 주식투자하는 것이 수지맞는 장사라는 게 당시 미국인들의 보편적인 인식이었다.

그러나 다른 투기와 마찬가지로 1929년 10월 은행들이 빚으로 투자한 고객들에게 상환을 요구하면서 주가는 폭락했다.

은행사와 증권사들이 도산했으며 투자은행 임원들은 도망쳤다.

모든 기업의 주식은 몇 달 새 절반 이하로 폭락했다. 증시공황은 바로 경제 붕괴로 이어졌다.

주가폭락은 1932년까지 이어졌다.

미국 GDP는 1929년 수준에서 60%가 줄어들었고 실업자 수는 1250만명까지 늘어났다.

1933년 대통령이 된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자유방임주의를 부정하면서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유도했다.

시장을 대신해 정부가 복지와 주택 노동 금융 물가 소득 최저임금을 결정했다.

미국은 그러나 이런 우여곡절 끝에 세계적 경제강국으로 더욱 굳건하게 자리를 지켰다.

⊙ 거품엔 긍정적 효과도

우리나라도 2002년 벤처붐이 크게 불었다.

새롬기술 등 일부 주식은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수백배나 가격이 올랐다.

그러나 불과 2년 만에 휴짓조각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결과 소수이기는 하지만 실력있는 벤처기업들이 탄생해 지금까지 활발하게 생산활동을 하고 있다.

거품은 심각한 부작용을 남기지만 시대가 바뀌고 새로운 경제동력이 태어날 때마다 거품이 형성돼 왔던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부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지킬과 하이드처럼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이 공존하는 것이 인간인 모양이다.

오춘호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ohch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