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중화주의는 漢 무제때 이민족 통치전략으로 탄생
일반적으로 중화주의는 한나라 무제 때 동중서(董仲舒)에 의해 확립되었다고 알려진다.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오랫동안 전쟁에 시달린 백성들이 지쳐있자 당시 통치자들은 도가적 정치사상인 무위이치(無爲而治·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다스리는 정치)를 시행하였다.

이로 인해 북쪽 국경지대의 오랑캐 침입이 잦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무제는 동중서의 제안을 받아들여 '모든 사상을 박멸하고 오로지 유가(儒家)사상만 추종한다'는 통치이념을 확립하게 된다.

춘추전국 시대를 거치면서 새로운 국가 질서를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가를 두고 많은 철학자 사상가들이 나름의 주장을 폈으나 무제는 예(禮)를 강조하는 공맹 사상만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유가 사상은 삼강오륜에서 보듯이 군신 부자 등 상하 간 예의를 중시한다.

예의를 모르는 이민족은 오랑캐라며 이민족에게 예의를 강요하는 수단으로 유가사상을 사용했던 것이다.

유가사상에 기반을 둔 외교는 어느 정도 먹혀 들어갔다.

그러나 그 후 이민족 침입이 계속되자 유가사상에 반기를 드는 학자들이 다시 등장했다.

대표적인 것이 한비자의 법가사상이다.

법가사상은 인간이란 이해타산적 존재이므로 도덕감정에 호소해서는 안되고 공권력으로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법가는 공동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법 집행이 필요하다며 부국강병을 강조했다.

중화주의는 이처럼 덕치와 법치의 두 가지 성격을 모두 갖고 있는데 현실에서는 엄격한 형벌과 힘에 의존하는 법치가 주로 적용되었다.

법가의 중화주의는 중국이 약할 때는 회유책으로, 강할 때는 패권주의로 나타났다.

패권주의를 내세운 중국은 주변국에 정치적 상하관계를 강요하고 조공을 요구했다.

⊙ 되살아나는 중화주의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은 중국이 1840년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패한 후 여지없이 무너졌다.

가치관의 혼돈 속에 중국은 서구의 진보적인 사상을 수용했으며 이 과정에서 1949년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선택하게 된다.

공산국가 중국은 미국·소련을 견제하고 제3세계 국가들과 연합하는 외교를 펴면서 이상국가 건설에 나섰다.

그러나 체제 자체의 결함으로 식량 자급에 어려움을 겪었고, 이상 사회 건설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집권한 덩샤오핑 정권은 1970년대 말 과감한 개혁 개방정책을 펴면서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했다.

이념에 관계없이 인민이 잘살기만 하면 된다는 흑묘백묘(黑猫白猫)론, 힘을 기를 때까지 숨을 죽이고 지내자는 도광양회(韜光養晦)를 부르짖으며 중국 인민들을 다독거렸다.

1990년대 들어 장쩌민의 중국은 국제무역기구(WTO)에 가입하고 강대국 중국의 역할을 모색하며 중화 민족주의를 공식적으로 내세우게 된다.

후진타오 현 지도부는 베트남 라오스 러시아 등과 영토 문제를 해결하는 등 평화의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다.

하지만 티베트를 무력으로 점령하거나 지린성 랴오닝성 헤이룽장성 등 동북 3성에서 발원한 민족의 역사를 모두 중국 역사에 편입시키는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있다.

중국의 민족주의가 패권적 중화주의로 변질될 지 모른다는 경계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조선이 중화주의를 받아들인 것은 유교사상을 근거로 하는 덕치의 요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민족주의가 배타적이거나 패권적 중화주의로 부활되지 않을지 많은 국가가 우려하고 있다.

박주병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jbpar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