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문화 상대주의는 갈등만 더 키운다?
20세기 말 세계의 저명한 학자들은 21세기에는 다양한 문화가 혼재하는 문화 다원주의 시대가 올 것으로 예상했다.

독일의 철학자 하버마스는 "세계 모든 곳에서 문화적 삶의 양식과 인종 세계관 종교의 다원성이 높아지고 있다"며 "여러 문화가 공존하기 위해서는 다수 문화가 가지고 있는 특권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화다원주의나 문화 다양성이 오늘날의 시대정신으로 자리잡았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들이 전망한 21세기가 8년이나 흐른 지금 과연 세계는 각국의 문화들이 존중되면서도 공존하고 있을까.

오히려 문화 간 갈등이 더욱 커지고 있지 않을까.

한국 문화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보편성을 찾고 있을까.

오히려 다원주의라는 이름 아래 특정 지역의 폭력을 묵인하게 되고 비인간적 삶을 용인한다면 문화 상대주의는 다만 지성의 무정부 상태와 가치문제에 대한 백치상태를 정당화하는 데 불과한 것은 아닐까.

⊙ 문화의 충돌인가 공존인가

미국의 정치학자 헌팅턴은 저서 '문명의 충돌'에서 공산권의 몰락으로 냉전체제가 무너진 뒤 세계 정치의 핵심적 갈등 요인은 이데올로기도 아니고 경제도 아닌 바로 문화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러한 시각에서 1990년대 이후 민족과 언어 종교 등 문화적 요소를 기반으로 한 갈등이 전 세계를 휩쓸었다고 분석하면서 앞으로 문화적 요소에 뿌리를 둔 갈등이 더욱 심화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세계화로 인해 늘고 있는 다른 문화권 사이의 접촉이 문화적인 충돌과 정치군사적인 충돌로 비화할 개연성이 높다는 것.

그는 따라서 세계화로 인해 각 민족 국가의 문화적 특수성만 부각되고 공통된 보편적 규범을 확고하게 수용하지 않는다면 문화 충돌이나 문명 충돌이 만연하는 세계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에 대해 프랑스의 학자 자크 아탈리 등은 문화 공존론을 주장하고 있다.

아탈리는 "앞으로 다양한 사상이나 문화가 모자이크처럼 공존하면서 짜깁기되는 레고문명이 나타날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서로가 서로의 이질성에 관한 관용을 베풀고 새로운 차이점을 권장하게 될 것"이며 "지금까지 없었던 문화적 뒤섞임을 의심의 눈초리가 아닌 이해의 눈길로 바라보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탈리아의 정치학자 임마누엘 윌러스틴 역시 21세기는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문화 다원주의 시대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한편 헌팅턴의 주장 이후 미국에서는 9·11 테러가 일어나 그의 예상이 맞아 떨어졌다는 지적이 제기되기도 했다.

⊙ 문화 다원주의는 시대 이념?

문화 다원주의 내지 문화 상대주의는 말 그대로 획일적인 가치에서 벗어나 다양한 문화와 다양한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양한 문화적 현상을 가치중립적으로 보면서 모두 인정하게 되면 상당한 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최근 학계의 시각이다.

더구나 문화 단위를 특정 국가로 한정하게 되면 국가 단위 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이를 인류 공동의 가치 규준에 따라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약점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독일 내에서 일어난 나치의 유태인 학살도 그들만의 문제일 뿐이라면 인류의 지성은 과연 무엇인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티베트인의 인권을 짓밟는 중국 당국의 처사도 마찬가지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모든 문화 현상에 대해 생대주의적 관점에 입각해 가치중립적이 된다면 자기 자신의 문화적 전통과 가치를 발전시켜 가는 것도 결국에는 불가능하게 된다.

더구나 우리가 한국 문화라고 부르는 많은 가치들이 알고보면 중국의 문화를 배우고 이식한 결과라는 지적에 우리는 어떤 답을 줄 수 있을까.

미국의 교육철학자 앨런 볼룸은 문화상대주의는 교육의 가장 중요한 동기인 가치있는 삶의 추구를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했고 미국을 쇠퇴시킨 가장 큰 원인으로 꼽고 있다.

상대주의의 만연이 결국 문화 통합과 가치에 대한 인간의 지적 갈구를 위축시켰고 단기적으로 유용한 지식 이외의 모든 지식은 쓸모없는 것으로 매도했다고 그는 꼬집는다.

즉 문화상대주의가 강조하는 '실용'은 문화적 '가치'나 '이념'보다 중요시되면서 더욱 페쇄적으로 만든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는 나아가 문화는 보편주의적인 힘과 이를 전파하려는 에너지를 상실했을 때 붕괴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 글로벌 스탠더드는 지켜야

우리가 매일 쓰는 달력이나 시간개념, 방위, 단위 등은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이다.

이른바 표준화돼 있는 것들이다.

이런 것들처럼 개인의 자유나 인권, 존엄성 등 인간이 가지는 고유의 가치나 규범 등은 보편성을 가져야 한다는 게 문화 보편주의자들의 주장이다.

즉 인류 문화의 진보 자체를 부정하거나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나 규범에까지 무분별하게 상대주의적인 입장을 취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한국은 고유 문화의 독자성을 자랑하고 있는 대표적인 국가다.

기 소르망은 정착 생활을 하는 국민은 민족의 단일 정체성에 집착하고 고유 문화를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고 밝힌 적이 있다.

그래서 세계적 차원의 문화 규범이나 보편적 규범을 등한시하거나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고 학자들은 지적한다.

한국 사회도 외국인에 대해 배척이나 차별 인권유린 등을 많이 행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어 보편화된 세계화의 규범을 폭넓게 수용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오춘호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ohchoon@hankyung.com


생각의 가지치기

- 문화상대주의는 어떤 문제가 있나.

- 문화상품을 외국에 수출할 때는 고유의 전통이 잘 팔릴까, 아니면 보편적인 정서가 잘 팔릴까.

- 유교의 가치와 기독교 가치는 공존할 수 있을까.

- 문화 상대주의 시대의 보편 윤리는 무엇일까.

- 외국인은 한국 문화를 어떻게 생각할지 토론해보자.

- 한국인들은 서구에 대해서는 상대주의자요 후진국에 대해서는 보편주의자가 된다는 비판이 있다.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