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과학이 정치적으로 오용될 때 사회에 큰 피해
영화로도 상영된 게오르규의 소설 '25시'는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한 인간이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겪는 고통을 그리고 있다.

루마니아가 고향인 주인공 요한은 자신의 아내를 탐내는 헌병에 의해 유대인으로 취급돼 징집되자 헝가리로 도망쳤으나 다시 잡혀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요한은 감옥에서 인류학을 연구하는 독일군 장교에 의해 순혈 독일인(아리아인)으로 판정받아 영웅 대접을 받게 되지만 독일이 물러난 후 들어온 러시아군에 의해 다시 포로로 감옥에 들어간다.

영화는 13년간 루마니아인 유대인 독일인으로 취급되며 가족을 잃고 고통을 겪는 주인공의 파란만장한 역경을 통해 당시 우생학과 전쟁의 참상을 비판하고 있다.

우생학은 영국의 생물학자 F 골턴(francis golton)이 우수한 유전소질을 가진 인구를 늘리고 열악한 유전소질을 가진 인구를 억제하려는 목적으로 1883년 창시한 응용과학이다.

그러나 골턴의 의도와 달리 2차 세계대전 당시 우생학은 나치 정권에 의해 유대인을 대량 학살하는 이론으로 악용됐다.

과학이론이 정치적 목적으로 악용되는 경우는 적지 않다.

다이너마이트처럼 발명품만이 의도와 달리 전쟁 등에 이용되는 것이 아니다.

과학이론도 정권에 의해 또는 이익집단에 의해 종종 악용된다.

과학이론이 잘못 사용되면 과학은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라는 사람들의 생각 때문에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 건강 생명과 관련된 검증되지 않은 실험 결과가 이익집단에 의해 오용될 경우 사회는 판단에 어려움을 겪게 되고 패닉 상황에 빠지기도 한다.

사회에 큰 피해를 갖고 오는 것은 물론이다.

1990년대 초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미국산 자몽 발암물질 사건은 검증되지 않은 암발생 위험이 언론에 과장 보도되는 바람에 미국의 보복조치로 농민들만 피해를 본 사건이다.

발암물질 사건은 미국에서 먼저 시작됐다.

CBS방송이 1989년 2월 사과에 발암물질이 있다는 미국 자연자원방어협의회(NRDC)의 자료를 대대적으로 보도한 게 불씨였다.

당시 미국 환경보호처는 사과를 주스로 만들 때 사과 농약의 알라성분이 UDMH 성분으로 바뀌어 특정 종류의 생쥐에게 암을 일으킬 수 있다는 미확정된 실험 결과를 갖고 있었는데, 자연자원방어협의회가 사과에 발암물질인 알라가 있다고 임의로 해석해 '우리 아이들 식품속에 살충제'라는 보고서를 만들어 언론에 뿌렸던 것이다.

당시 미국 언론은 이 보고서를 모두 긍정적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CBS는 크게 보도했으나 워싱턴포스트, 월스트리트저널, NBC 등은 보고서 내용에 문제가 있다며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아이의 생명이 위협받는다는 보도를 접한 후 겁먹은 여론은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

세계보건기구 식량농업기구 등의 전문가들이 알라가 인체에 암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밝히고 과학전문지 사이언스지가 NRDC를 사기협잡꾼이라고 비판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설사 암에 걸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생쥐와 사람의 몸무게를 비교하면 매일 2만개의 사과를 먹어야 된다는 계산이 나오므로 위험하지 않다고 설명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결국 미국 연방정부는 사과 농가를 위해 팔리지 않은 사과를 수천톤 매수해 폐기 처분하기에 이르렀다.

사과에 발암 물질이 있다는 보도가 나올 즈음 국내의 한 소비자단체는 당시 대량 수입되던 미국산 자몽에 발암물질이 있다는 자료를 내놓았다.

자몽은 사과와 달리 두꺼운 껍질을 까서 먹고 알라가 바로 암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점을 과학자들이 강조하고 있었지만 무시됐다.

보도의 영향력은 엄청났다.

발암물질이 들어있다는 소식에 자몽 판매는 거의 중단되다시피했다.

자몽 수입상들이 큰 피해를 본 것은 물론 미국 정부는 과학적 근거 없이 불매운동을 한다면서 한국산 배의 수입금지 조치를 내려 우리나라의 배 농가가 큰 타격을 입었다.

당시 이 사건을 취재했던 한 기자는 10년 후 '자몽 보도'의 잘못을 인정하기도 했으나 배 농가의 피해는 돌이킬 수 없었다.

인체가 유해물질로 위협을 받으면 보건당국과 언론은 당연히 이를 경계해야 한다.
[Cover Story] 과학이 정치적으로 오용될 때 사회에 큰 피해
그러나 경계가 과도하면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올 있다.

특히 과학 지식이 없는 단체가 확정되지 않은 연구결과를 멋대로 해석해 언론에 유포할 경우 사회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인체에 위험하다는 연구결과는 대부분 언론이 비중을 두고 다루게 마련이고 매체의 속성상 TV 화면은 과장되기 쉽다.

세계 환경운동의 기폭제가 된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이 1962년 출간 된 후 사용금지된 DDT 농약도 위험성이 과장된 면이 없지 않다.

DDT는 말라리아 모기의 서식을 줄이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다.

DDT 사용을 금지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매년 5000건에 불과하던 말라리아가 1999년 5만건으로 크게 늘어 2000년부터 다시 DDT를 사용하도록 허용하고 있다.

30년 전 DDT 사용금지를 주장했던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최근 'DDT로 말라리아와 싸우자'라는 주제의 사설을 내 보내기도 했다.

과학지식은 이처럼 양날의 칼과 같아 잘 쓰면 유용하지만 잘못 쓰일 경우 오히려 큰 피해를 줄 수 있다.

박주병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jbpar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