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이 왜 지금 주목받는가.
광우병을 비롯해 AI(조류바이러스) 황사 원자력 유전자 지진 등 과학관련 이슈가 홍수처럼 넘쳐 난다.
과학을 알지 못하고선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다.
과학이 발전하는 만큼 과학과 과학자의 권위도 커지고 있다.
과학적 이성이 종교의 영역에까지 도달했다는 학자들도 있다.
토머스 헉슬리는 이미 19세기 말 날로 커져가는 과학과 과학자의 권위를 교회에 빗대 비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과학적 권위가 커지는 만큼 과학은 시민들과 유리된다.
시민들은 이제 과학과 사이비 과학의 차이를 알지도 못한다.
과학이 곧 이성이며 객관적 실재에 부합한다는 막연한 '믿음'만 시민들에게 존재하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이 같은 믿음이 광기로 변할수 있다고 문명비평가들은 경고한다.
영국의 물리학자 스노는 이미 1963년에 저서 '두 문화'(Two Cultures)에서 과학자와 비과학자는 다른 문화로 존재하고 두 문화 사이에는 서로 만날 만한 곳이 없으며,심지어 과학자와 인문계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거의 커뮤니케이션이 없고 상호 이해보다는 일종의 적의 같은 것을 품고 있다고 얘기하고 있다.
그는 "비과학자들은 과학자가 인간의 조건을 알지 못하며 천박한 낙천주의자라는 뿌리 깊은 선입관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는 이어 "과학자들은 문학적 지식인들이 전적으로 선견지명이 결여돼 있으며 반지성적이며 예술이나 사상을 존재 순간에만 한정시키려한다는 선입관을 갖고 있다"고 덧붙인다.
이처럼 다른 문화를 가진 그룹들의 오해는 결국 서로를 헐뜯게 만들어 위험하기까지 하다는게 스노의 지적이다.
이 위험은 실제로 20세기 들어 두드러지고 있다.
구러시아에서는 잘못된 유전이론에 근거해 농업개량을 주장한 뤼센코의 유전학이 스탈린의 지지로 소련의 공식적인 유전학으로 자리잡기도 했다.
나치 독일은 독일인들의 유전자가 다른 민족에 비해 우수하고 유태인 유전자가 하잘 것 없다는 우생학을 내세워 나치즘을 정당화했다.
지구 온난화처럼 명확한 근거가 나타나지 않는 현상에 대해서도 어김없이 과학의 단어가 난무한다.
과학적 개념조차 불투명한 분야에 엄청난 돈만 투자되는 분야도 많다.
한국을 포함한 7개국이 참가하고 있는 상온 핵융합 에너지 연구도 실은 실체가 불투명하다는 지적도 많다.
이들 국가는 이 실험을 위해 50억달러 이상을 투자하고 있다.
영국의 역사학자 홉스봄은 "20세기는 과학의 진보와 이에 대한 시민의 불안이라는 패러독스를 갖고 있다"고 설파하고 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과학은 무엇인가.
오춘호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ohchoon@hankyung.com
광우병을 비롯해 AI(조류바이러스) 황사 원자력 유전자 지진 등 과학관련 이슈가 홍수처럼 넘쳐 난다.
과학을 알지 못하고선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다.
과학이 발전하는 만큼 과학과 과학자의 권위도 커지고 있다.
과학적 이성이 종교의 영역에까지 도달했다는 학자들도 있다.
토머스 헉슬리는 이미 19세기 말 날로 커져가는 과학과 과학자의 권위를 교회에 빗대 비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과학적 권위가 커지는 만큼 과학은 시민들과 유리된다.
시민들은 이제 과학과 사이비 과학의 차이를 알지도 못한다.
과학이 곧 이성이며 객관적 실재에 부합한다는 막연한 '믿음'만 시민들에게 존재하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이 같은 믿음이 광기로 변할수 있다고 문명비평가들은 경고한다.
영국의 물리학자 스노는 이미 1963년에 저서 '두 문화'(Two Cultures)에서 과학자와 비과학자는 다른 문화로 존재하고 두 문화 사이에는 서로 만날 만한 곳이 없으며,심지어 과학자와 인문계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거의 커뮤니케이션이 없고 상호 이해보다는 일종의 적의 같은 것을 품고 있다고 얘기하고 있다.
그는 "비과학자들은 과학자가 인간의 조건을 알지 못하며 천박한 낙천주의자라는 뿌리 깊은 선입관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는 이어 "과학자들은 문학적 지식인들이 전적으로 선견지명이 결여돼 있으며 반지성적이며 예술이나 사상을 존재 순간에만 한정시키려한다는 선입관을 갖고 있다"고 덧붙인다.
이처럼 다른 문화를 가진 그룹들의 오해는 결국 서로를 헐뜯게 만들어 위험하기까지 하다는게 스노의 지적이다.
이 위험은 실제로 20세기 들어 두드러지고 있다.
구러시아에서는 잘못된 유전이론에 근거해 농업개량을 주장한 뤼센코의 유전학이 스탈린의 지지로 소련의 공식적인 유전학으로 자리잡기도 했다.
나치 독일은 독일인들의 유전자가 다른 민족에 비해 우수하고 유태인 유전자가 하잘 것 없다는 우생학을 내세워 나치즘을 정당화했다.
지구 온난화처럼 명확한 근거가 나타나지 않는 현상에 대해서도 어김없이 과학의 단어가 난무한다.
과학적 개념조차 불투명한 분야에 엄청난 돈만 투자되는 분야도 많다.
한국을 포함한 7개국이 참가하고 있는 상온 핵융합 에너지 연구도 실은 실체가 불투명하다는 지적도 많다.
이들 국가는 이 실험을 위해 50억달러 이상을 투자하고 있다.
영국의 역사학자 홉스봄은 "20세기는 과학의 진보와 이에 대한 시민의 불안이라는 패러독스를 갖고 있다"고 설파하고 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과학은 무엇인가.
오춘호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ohch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