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포럼이 편찬한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기파랑간)는 기존 역사교과서들이 간과하고 있는 문제들을 자유주의와 시장경제 관점에서 명쾌하게 서술하고 있다.

대한민국 건국 과정과 식민지 시기, 19세기 말 개화파의 역할 등 근·현대의 역사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서울대 이영훈(경제학), 박효종(윤리교육) 교수 등 이 교과서의 저자들은 "그동안 기존 역사교과서들이 우리가 피땀 흘려 살아 온 가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 이 책을 펴내게 됐다"고 얘기하고 있다.

이 교과서가 기존 교과서와 어떻게 다른지 분야별 논점들을 짚어본다.
[Cover Story] 대한민국 건국으로 근대 민족국가 첫 발

⊙ 대한민국 건국

대안교과서는 1945년 8월15일 광복보다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건국에 더 큰 무게를 두고 있다.

해방 이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적극 참여해 대한민국을 민주공화국으로 탄생시켰다.

건국 이후 적잖은 시련과 도전이 있었지만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건국의 기초이념을 충실하게 발전시킴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안정과 번영을 이루게 됐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국민의 기본권이 확고하게 정착되고 보통 선거로 정권을 교체하는 민주주의 국가가 됐으며 경제적으로는 세계 최빈국 수준에서 선진국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는 위업을 이뤘다는 것이다.

지난 60년간 세계사의 흐름도 개인의 자유와 재산권을 존중하고 그것을 국가체제의 기본 원리로 채택한 체제가 인간의 물질적인 복지와 정신적 행복을 증진하는 올바른 방향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어서 제헌 헌법에 담긴 건국이념은 그 방향이 정당했다고 설명한다.

아울러 제헌의회 의원들의 출신으로 볼 때 대한민국 건국세력이 친일파 출신이라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다고 지적했다.

이에 반해 건국 과정에 대한 기존 좌파 역사학계의 인식은 미국의 사주를 받은 이승만이 민중의 반대를 누르고 분단 정권을 수립했다는 논리를 펼치면서 결국 현대사는 분단의 역사로 점철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 일제 식민지

기존 역사학계는 일제 식민지 시대를 일제의 폭압적 지배와 수탈,그리고 그에 대한 저항과 친일 협력이라는 구도에만 맞춰 설명하고 있다.

대안 교과서도 일제의 성격에 대해서는 "한국인의 정치적 권리를 부정한 폭력적 억압 체제였다"고 규정한다.

그러나 "그 시기가 억압과 투쟁의 역사만은 아니었고 근대 문명을 학습하고 실천함으로써 근대 국민국가를 세울 수 있는 사회적 능력이 두텁게 축적되는 시기이기도 했다"고 평가한다.

식민지 시기가 근대 문명을 학습하고 실천한 시기였으며 경제개발과 생활수준 향상이 일어났다는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역사학계는 완전한 신분해방이 갑오경장 때 이뤄졌다고 기술하지만 대안교과서는 이를 부정하고 1912년 조선총독부의 '민사령'이라는 법률을 통해 식민지 한국에서 근대적인 사유재산제도가 성립하고 이로써 양반과 상민을 차별하던 조선왕조 시대의 신분제는 공식적으로 사라졌다고 주장한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에 대해서도 다른 입장을 취한다.

기존 교과서들은 토지조사 사업으로 한국인 상당수가 토지를 빼앗겼다고 적고 있지만 대안교과서는 그 결과 "전국의 모든 토지에 대해 토지대장,지적도,등기부가 작성됐으며 국가가 토지재산에 대한 증명제도를 완비함으로써 토지거래가 활성화하고 토지를 담보로 한 금융이 발전하였다"고 주장한다.

대안교과서는 나아가 "총독부가 신고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한국 농민에게 신고를 강요하고,전체 토지의 40%에 달하는 무신고지가 발생하자 국유지로 몰수했다는 기존의 주장은 원래부터 근거가 없다"고 서술하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조선총독부가 시도한 임야 조사사업에 대해서도 "조선왕조의 임야정책은 공유(公有)의 명분을 내세워 사유림을 인정하지 않았는데,임야의 사적 관리주체가 없어 산림이 황폐해지는 부작용이 있었다.

이와는 달리 총독부의 임야정책은 사적 관리주체를 창출하여 산림녹화를 추진하는 방향으로 시행되었다"고 주장한다.

⊙ 19세기 후반 근대화 과정

대안교과서는 그동안 역사학계에서 부정적으로 평가해왔던 개화파에 대해 '근대화를 추구했던 선각자들'이라는 시각으로 재평가를 내리고 있다.

개화파의 주역인 김옥균이 남긴 '갑신일록'(甲申日錄)을 근거로 급진개화파들이 청(淸)에 대한 조공과 문벌 폐지 등을 시도했다는 점을 부각시키면서 "한국 근·현대사에서 근대화를 추구했던 선각자들로 적극 평가되어야 한다"고 기술했다.

이들 개화파가 주도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참여한 인물이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이며 대한민국 건국 역시 역사적으로 개화파에 의해 주도됐다는 점이 이들을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대한제국에 대해서는 국가의 모든 권한을 군주 한몸에 집중시킨 반면 일반 국민의 정치 참여는 금지한 전제국가에 지나지 않았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대한제국이 성립한 가장 결정적인 외부 조건으로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배하고 일본이 승리했기 때문임을 들면서 광무개혁이 일본으로 대표되는 외세의 침략 시도에 맞선 자주적 근대화 운동이었다는 역사학계 해석에 대해 반대하고 있다.

동학은 하나의 농민 봉기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들의 봉기는 "유교적인 근왕주의(勤王主義:임금이나 왕실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주의)에 입각해 서민의 경제생활을 안정시키고자 했던 복고적인 성격이 강했다"고 지적한다.

또한 농민군이 봉기하면서 요구했다는 '폐정개혁안'에는 탐관오리나 횡포한 부호 및 양반 처벌,노비 문서 소각 등이 포함돼 있다고 하지만,이는 1940년 오지영(吳知泳)이 출간한 '역사소설 동학사'에 수록된 내용이며 실제 동학군은 이런 요구를 한 적이 없다고 부정한다.

⊙ 4·19와 5·16

1960년에 발생한 4·19에 대해서는 부정에 항거하는 학생들의 의거에 국민이 동참해 권위주의 정부를 타도함으로써 국민주권주의와 대의제적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를 확인한 민주 혁명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국가체제의 기본 원리를 바꾸려고 했던 민중 혁명이나 계급 혁명은 아니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또한 1961년의 5·16에 대해서는 일부 군부 세력이 헌법 절차를 거쳐 수립된 정부를 불법적으로 전복한 쿠데타임을 분명히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도덕적 멍에를 안은 채 군인 특유의 추진력과 실용주의적 방식으로 경제 발전을 추진했으며 결과적으로는 근대화 혁명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평가를 내렸다.

오춘호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ohch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