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정말로 존중한다면 허용해야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보면 주인공 프랭키는 사지가 마비된 채 안락사를 원하는 매기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준다.

힐러리 스웽크의 고난했던 삶과 진정한 사랑의 결과란 것을 알게 된 관객들은 누구나 프랭키의 '범법행위'에 공감할 것이다.

이처럼 안락사는 경우에 따라선 누구나 공감하고 필요성을 느끼는 것이기도 하다.

안락사 제도가 존재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환자 스스로가 존엄하게 죽을 자기 결정권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헌법에 보장된 인간의 존엄과 가치는 삶의 존엄은 물론 죽음의 존엄까지 포함한다.

즉 누구나 인간다운 죽음을 맞이할 권리를 갖고 있다.

사실 인간은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의 자유, 죽음을 앞에 두고 있을 때는 '언제'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본래부터 갖고 있다.

흔히 안락사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생명 보호를 강조하지만 오히려 안락사는 생명 보호 차원에서 허용되어야 한다.

단순한 생명 연장이 아닌 생명의 유용성과 가치 측면에서 보면 그렇다.

이 세상에 고통을 받으면서까지 오래 살려는 사람이 과연 몇명이나 될까?

안락사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강조하는 생명의 존엄성도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나라는 사형 제도를 인정하고 있다.

만일 생명 존중을 들어 안락사를 금지한다면 사형제도도 폐지되어야 마땅하다.

생명이 국가에 의해 절대적으로 보호받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의학적으로 죽음을 선고받은 사람에게 무의미하게 치료를 계속하기보다는 본인과 가족들의 정신적·경제적·육체적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여주는 것이 오히려 이들을 위한 행동일 것이다.

뇌사상태에 빠진 가족을 무한정 보살피며 깨어나기를 기다릴 수 없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물론 안락사를 허용하면 고의적 살인이나 부작용이 뒤따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체계화된 검증 시스템과 법 제도를 마련함으로써 충분히 보완할 수 있다.

실제로 소극적 안락사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기도 하다.

죽음을 눈앞에 둔 회복 불능의 환자가 무의미한 삶을 연장하는 경우가 많이 있고 참된 의미에서 생명을 존중한다는 측면에서 안락사는 허용되어야 한다.

윤승철 생글기자(동국대 문예창작과 입학예정) tmdcjf238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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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자체보다는 행복이 중요해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단지 햄릿만의 고민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이들이 삶과 죽음의 '선택' 기로에 서 있다.

안락사는 환자의 의지에 따라 자발적, 비자발적, 반자발적 안락사로 나뉜다.

또한 시술 방법에 따라서 적극적 안락사와 소극적 안락사로 나뉘기도 한다.

의도와 결과가 어떻든 간에 인위적으로 사람의 목숨을 끊는 것은 엄연한 '살인'이라는 비판과 인간의 자율성과 선택권을 보장해 줘야 한다는 의견이 대립되고 있다.

개인의 자율성과 사회적 의무 어느 것을 중요시 할 것이냐의 문제인데 나는 개인의 자율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본다.

안락사 반대론자들은 생명에 관한 문제는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고려해야 하며, 삶의 포기는 사회에 대한 일종의 배신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안락사를 고려하는 사람에게 의무를 묻는다는 것은 옳지 않다.

의무란 선택의 대가인데 생명을 얻거나 병에 걸리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사람에게 법적, 도덕적 의무를 물을 수는 없는 일이다.

오히려 존엄성과 품위를 지킬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옳다.

윤리적으로도 마찬가지다.

반대론자들은 의도와 결과가 옳더라도 인위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행위 자체는 안된다고 한다.

이는 '생명은 신이 주신 선물'이라는 유신론에 근거한다.

즉 '생명을 불어 넣거나, 끊는 것은 인간이 아닌 신(神)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생명은 신이 아닌 개개인의 소유이다.

그 자체에 굉장한 가치가 있다기 보다는,개개인이 행복을 느낄 때 생명의 참된 가치가 있다.

이미 삶의 목적을 상실하고, 고통 뿐인 삶을 사는 사람에게 공감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가치를 강요하는 것은 난센스다.

인간이 생각하는 최고의 가치는 '행복'이다.

생명은 그 가치를 실현하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타인의 자유와 권익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우리는 저마다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안락사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단순히 생명 자체가 가지고 있는 위엄을 생각하기보다,보다 현실적으로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따져 봐야 한다.

이정민 생글기자(인하대 사회과학부 1년) c2022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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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실체를 모르는데 편안한 죽음이란 뭔가?

기본적으로 죽음에 대한 선택권은 그 누구도 가질 수가 없다.

인간의 생존은 개인의 육체뿐 아니라, 사회적 관계 속에서도 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단순한 생존의 의미를 떠나, 많은 사람들이 관계되어 있는 한 인간 존재의 끝을 어느 누가 규정지을 수 있다는 말인가?

자신의 의지에 의해 태어난 사람은 없다.

탄생이 인간의 선택 영역 이상의 고귀한 것이듯 '죽음' 역시 인간이 선택할 수 없는 자연의 영역이다.

설사 삶의 마침표에 대한 선택권이 본인에게 있다고 해도, 치료비 대부분을 환자와 환자 가족이 부담해야 하는 현실에서는 본인의 선택을 100% 자율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엄청난 치료비에 힘들어 하는 가족들 옆에서, 환자가 어떻게 삶의 의지를 가질 수 있을까?

실제로 영국의 의학교수인 사이먼 웨슬리 박사는 "삶을 포기하려는 환자의 행동은 병 자체의 고통보다 심리적 위축이 더 큰 요인으로 작용한다"며 안락사를 반대했다.

안락사는 환자로 하여금 삶의 의지를 포기하게 만듦으로써 자행되는 살인행위이다.

또한 생명의 자연적 종료 시점을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도 안락사는 위험하다.

시한부 선고에도 불구하고 건강하게 사는 사람들, 수십년간 식물 인간 상태로 있다가 깨어난 사람들, 심지어 입관(入棺) 후 깨어난 사람 등등.

물론 이 같은 현상은 '기적'으로 표현되지만 낮은 확률을 들어 한 존재의 생존 가능성을 짓밟는 행위는 살인과 다름없다.

안락사(安樂死).

'편안한 죽음' 이라는 말로 그럴듯하게 포장했으나, 사실 생명 외적인 잣대에 의해 생명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인간의 기본적 품위 유지를 위한 일이다', '편안한 생의 마감을 위한 일이다' 같은 말은 건강한 자들의 배부른 핑계일 뿐이다.

세상에 죽음의 실체를 알고 있는 이는 존재할 수 없다.

죽음의 실체조차 모르는 이들이 평가하는, 품위 있고 편안한 죽음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안락사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환자로 하여금 죽음을 강요하기보다는, 국가의 의료복지를 확대하고,의약품 연구개발을 통해 환자들의 고통을 경감시켜 줌으로써 환자에게 삶에 대한 의지를 심어주는 일이 더욱 필요하다.

송유림 생글기자(울산 현대청운고 2년) u-lim_styl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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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안락사 허용이 사회에 미칠 악영향

안락사는 환자의 생명을 의도적으로 단축시키거나, 지속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음으로써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행위이다.

이는 당사자와,관련된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준다는 의미에서 옹호될 수도 있으나 사회 불안을 야기하고 살인행위에 대한 의식을 모호하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먼저 안락사는 명백한 살인행위이다.

안락사는 주로 회복 가능성이 희박한 식물인간에게 행해지는데, 이들은 아직 죽지 않은 인간이며 실제로 깨어나기도 한다.

살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성급하게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로 판단하여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은 살인과 다를 것이 없는 비인간적인 행위이다.

의학적으로도 뇌신경은 아주 조금씩 회복되기 때문에 오랜 기간이 지나면 의식을 회복할 수도 있다.

게다가 안락사 허용은 사회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안락사는 사회가 개인을 버리는 행위이다.

개인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사회에 의무를 다하고 사회로부터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

사회는 구성원에게 그들의 있음직한 위험을 끝까지 책임진다는 확신을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개인은 사회를 신뢰하지 못하고 구성원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을 것이며, 식물 인간은 회복 가능성이 없다.

안락사를 허용하면 사회와 개인의 연결 고리가 느슨하게 되고, 심하면 사회 유지에 어려움이 따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안락사를 찬성하는 주장은 위험한 논리에 근거하고 있다.

찬성자들은 환자의 생명유지 비용이 많이 들고 관련 당사자들의 고통도 크기 때문에 안락사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사회에 짐이 되고 타인에게 해를 주는 범죄자,장애인,노숙자 등도 사형시켜야 하는가? 찬성자들은 식물 인간의 장기를 다른 환자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한다. 그럴 경우 인간은 타인의 생명을 앗아간다는 것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갖게 될 것이다. 안락사 찬성자들의 논리를 들어보면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안락사가 사회에 미칠 파급효과를 고려하지 못한 생각이다.

국민이 정부를 신뢰하지 못하고, 범죄자, 장애인도 죽음으로 처리하며 식물 인간의 장기가 헐값에 시장에 나오는 미래를 상상할 수 있을까?

권대욱 생글기자(동북고 2년) maru_raon@ha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