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태아의 생명권이냐, 여성의 선택권이냐 … 낙태의 논쟁사
낙태만큼 세계적으로 뜨거운 논쟁을 몰고온 사회 이슈도 드물 것이다.

태아 생명을 존중할 것인가, 여성의 선택권을 존중할 것인가는 선뜻 답하기 어렵다.

생명론과 선택론으로 단순화시켜 어느 한 쪽 입장을 취한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다.

낙태 논란은 사회관습, 남아선호, 인구문제, 의료윤리 등 다양한 문제들과 얽히고설킨 딜레마이기 때문이다.

낙태 논란의 뿌리는 의외로 깊다.

의료기술의 발달로 현대에 들어와서 낙태 문제가 본격 제기된 게 아니다.

고대 사회에서도 낙태는 공공연히 행해졌고 당시로선 유일한 피임수단이기도 했다.

낙태 논쟁사를 들여다보자.

⊙ 낙태 논쟁의 철학적 뿌리

낙태란 법률상 '의도된 임신중절', 의학적으론 '인공유산'을 뜻한다.

종교적으론 '인간의 의지가 개입된 생명 제거의 기술적 죄악'이라고 규정한다.

낙태 논란의 시초는 낙태와 영아 살해가 상당 부분 허용됐던 고대 그리스·로마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플라톤은 저서 '국가'에서 태아가 출생 이전부터 생명을 갖는다고 믿었지만 사회와 가족의 복지가 태아의 생명권보다 중요하다고 봤다.

따라서 국가 경영을 위해 낙태를 보다 큰 선을 위한 합당한 희생쯤으로 간주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상적인 사회에선 인구가 과도할 경우 낙태를 인구조절 수단으로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전통 아래 로마법에선 태아를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초대 기독교에서 태아 생명의 가치를 중시하면서 낙태를 살인으로 간주하기 시작했고, 로마에서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엔 낙태금지가 사회관습으로 자리잡았다.

아우구스티누스, 토머스 아퀴나스, 루터, 칼뱅 등 신학자들은 낙태를 죄악으로 간주, 이것이 오늘날 서구 사회의 낙태반대 전통의 뿌리가 된다.

현대에 들어와선 시몬느 드 보봐르가 '제2의 성'에서 낙태를 여성해방의 상징으로 담론화하면서 논란이 격해졌다.

의료기술의 발달과 함께 1970년대 이후 낙태합법화 운동의 거센 물결이 일게 된다.

⊙ 생명은 언제부터 시작되나

[Cover Story] 태아의 생명권이냐, 여성의 선택권이냐 … 낙태의 논쟁사
생명의 시작을 보는 시점도 참으로 다양하다.

이 문제는 낙태 논란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우선 '48시간설'이 있다.

정자와 난자의 유전자끼리 결합하는 데 48시간이 걸리며 그 때부터 생명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착상 확률이 30~40% 수준이며 착상 후 수정란이 분열(쌍둥이)될 수도 있어 독립된 인간이란 관점에서 문제가 있다.

'14일설'은 수정 후 자궁 내막에 착상이 완료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다.

이때부터 태아와 모체 간의 '관계'가 형성된다고 한다.

그러나 분만 즉시 사망하는 무뇌아 등 치명적 기형아 문제를 설명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이어 '60일설'은 뇌가 형성되기 시작한 시점이다.

인간의 특성을 갖기 위해선 대뇌 소뇌가 완성(대개 90~100일)돼야 한다는데 이 설의 한계가 있다.

'28주설'은 1967년 영국에서 처음 제정됐고 1973년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로 대(對) 웨이드' 판결에 적용한 개념이다.

당시 판단 기준은 미숙아가 태어났을 때 살려낼 수 있는 마지노선이었다.

하지만 현대의학에선 22주된 태아도 살려낼 수 있다는 것이 맹점이다.

우리나라는 모자보건법에서 28주설을 생명의 기준으로 채택하고 있고 형법에선 '10개월'설을 기준으로 삼는다.

⊙ 태아의 생명권인가, 여성의 선택권인가

여성해방 운동이 본격화된 1960년대 이후 낙태는 여성의 자기실현 욕구와 자율적 선택의 상징처럼 부각된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은 그 정점에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같은 진보적 견해는 생명윤리를 강조하는 종교적 견해와 충돌하면서 논쟁을 증폭시켜 왔다.

낙태와 함께 논의되는 것이 피임이지만 도덕적 차원에선 차이가 크다.

이진호 계명대 교수는 "피임은 아직 실존하지 않는 생명체에 대한 기술적 행위이지만 낙태는 엄연히 실존하고 있는 생명체에 대한 기술적 행위이며 살인"이라고 강조했다.

즉 현대 사회에서 자신의 선택, 능력 안에 있는 피임법을 사용하지 않고 낙태를 하는 것은 무책임한 행동이란 것이다.

그러나 여성의 권익을 강조하는 시각에선,낙태를 가볍게 여기고 성행하게 만드는 사회 조건들(이를테면 남아선호, 미혼모를 보는 시선)이 여전한 상황에서 원하지 않고 양육을 책임질 수 없는 임신이라면 낙태가 덜 나쁜 선택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책임지지 못할 생명을 낳는 것보다는 낳지 않는 게 낫다는 얘기다.

피할 수 있음에도 자행되는 낙태는 분명 비도덕적이다.

하지만 마냥 비난만 할 수 없는 현실적 이유도 있다.여러분들은 답을 찾았는지….

오형규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o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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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탁태논쟁, '로 對 웨이드' 사건

기독교 전통이 강한 미국에선 낙태가 여전히 인종문제 만큼이나 격렬한 논란거리다.

낙태에 대한 찬반 태도가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상징적인 잣대가 되기도 한다.

공화당 대선 후보인 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이 지난해 낙태 옹호 발언을 했다가 종교계로부터 '위선자'라는 비난 속에 지지율이 뚝 떨어지기도 했다.

올해 미국 대선에서 반드시 한번은 짚고 넘어갈 논란거리인 만큼 귀추가 주목된다.

미국에서 낙태논쟁은 1973년 연방대법원이 여성의 낙태 권리를 인정한 '로 대(對) 웨이드'(Roe v. Wade) 판결로 절정을 맞았다.

이 사건은 1970년 두 여성 변호사가 제인 로(본명은 노마 맥코비)라는 여성을 대신해 텍사스 주정부(헨리 웨이드 지방검사)를 상대로 낙태금지법이 위헌이란 소송을 내면서 비롯됐다.

당시 텍사스주법에는 산모 생명의 위험이 없는 한 낙태를 금지하고 있었다.

맥코비는 생명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원치 않는 임신이었고 워낙 가난해 양육 능력도, 낙태가 합법화된 다른 주로 여행할 경비조차 없어 텍사스주에서 낙태를 시도하다 주법에 막힌 것이다.

주정부와의 소송에서 맥코비 측이 승소하자 사건은 결국 연방대법원까지 올라갔다.

대법원은 여성이 낙태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는 수정헌법 14조에서 보장하는 사생활에 대한 사항이며, 이를 제한하는 주법은 무효라고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은 9명의 대법관 중 7 대 2로 결정났는데, 당초 보수 성향이던 샌드라 데이 오코너 대법관 등이 생명권보다 개인 권리 옹호쪽으로 돌아선 결과다.

정작 맥코비는 소송이 길어지면서 낙태시기를 놓쳐 아이를 낳았고, 1995년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 오히려 낙태반대 운동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아직도 다수의 미국인들이 여성의 자의적인 낙태에 반대하고 있다.

실제로 2003년엔 공화당은 부분출산 낙태금지법(임신 12주 이후 낙태 사실상 금지)을 통과시켰고 연방 대법원의 위헌소송에서도 합헌 판결이 났다.

오코너 대법관이 은퇴하면서 보수성향 대법관이 다수가 되어 판결이 미묘하게 바뀐 것이다.

'로 대 웨이드' 판결 이후엔 임신 28주(6개월) 이전까지 산모의 낙태권을 허용해왔다.

28주에서 12주로 줄어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