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사람들은 왜 유토피아를 꿈꿀까?
토머스 모어의 소설 '유토피아'(1516년)에서 유래한 유토피아(utopia)는 그리스어로 없다는 의미의 ou와 장소를 뜻하는 topos의 합성어(영어로는 no place)이다.

문자 그대로 지구상에는 없는 곳이다.

문화권마다,종교마다 이 같은 유토피아적 개념이 있다.

에덴동산이나 젖과 꿀이 흐른다는 가나안,천국,극락에서부터 엘도라도,샹그리라,엘리시움,샴발라,무릉도원,이어도 같은 것들이다.

따라서 유토피아는 세상에 없는 곳이지만 유토피아적 사고는 세상 어디에나 있다고 할 수 있다.

플라톤,생시몽,푸리에,마르크스,마르쿠제 등 수많은 사상가들이 유토피아를 상상했을 만큼 뿌리가 깊다.

철학,종교는 물론 민중들의 일상에서도 삶이 어려울수록 유토피아적 환상은 삶의 고통을 잊게 하는 마취제 역할을 해왔다.

유토피아를 꿈꾸는 것이 과연 '헛된 망상'인지,'인간의 본성'인지 선뜻 답하기 어렵다.

철학적인 유토피아의 원조는 플라톤의 '이상국가'로부터 출발해 마르크스가 변증법적 역사 법칙의 완성이라고 여겼던 공산사회의 개념에서 절정을 이룬다.

많은 사상가들이 그린 완벽한 세상은 강력한 중앙 통제,무오류의 지도자,공동 생산과 분배,무질서해질 수 있는 국민에 대한 끊임없는 교화,일사불란하고 질서정연한 사회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이는 역사의 종착역으로서 유토피아를 설정했을 때 필연적으로 회귀하는 결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식의 상상은 문학과 영화의 세계에서 여지없이 조롱거리가 된다.

20세기 전반기에 쓰여진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조지 오웰의 '1983',예브게니 자마찐의 '우리들'은 세계 3대 반(反)유토피아(anti-utopia,distopia) 소설로 유명하다.

이들이 그려낸 미래 유토피아를 보면 무오류의 지도자는 빅 브라더('1984')이거나 은혜로운 자('우리들')이고,중앙 통제는 강력하고 폭력적인 경찰로 나타나며('1984'),국민에 대한 교화는 인간이 인공으로 제조돼('멋진 신세계'),D-503이란 번호로 불리며('우리들') 시시콜콜한 사생활도 감시당한다.

영화 이완 맥그리거,스칼렛 요한슨 주연의 '아일랜드'(2005년)를 연상하면 한결 이해가 쉬울 것이다.

결국 유토피아적 사고는 이처럼 다양성,변화,일탈을 용납하지 않는 전체주의의 얼굴을 하고 있다.

칼 포퍼의 분석을 빌리면 역사의 완결을 상정함으로써 구성원들은 숨쉬기 어려운 '닫힌 사회'(closed society)인 것이다.

세상을 이런 저런 목적에 맞추어 기획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오류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많은 사람들도 권력을 쥐게 되면 같은 함정에 빠진다.

사람들은 늘 현실에 실망하고 좌절한다.

그럴수록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은 커진다.

있는 그대로,변화하지 않는 현실은 이런 열망을 해소해주지 못한다.

그래서 '완벽한 세상'은 몽상일지라도,'좀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것은 인간의 권리이자 의무이기도 하다.

오형규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ohk@hankyung.com